1. 주관적인 예술,
우리가 예술 작품
처음 만난 사람들과 자주 하는 인사 중에 “무슨 일을 하시죠?”라는 인사가 있지요!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저의 직업을 듣고선 “예술을 하시는 분이시구나 !“라고 한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은 과연 어떤 걸까요? 흙을 만지는 시간보다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지금의 제가 예술을 하고 있는 걸까요?
예술 (藝術) 이란 무엇일까?
[명사]
1.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공간 예술, 시간 예술, 종합 예술 따위로 나눌 수 있다.
3.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같이 사전에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예술이라고 칭합니다. 우리는 어떨 때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까요? 누구는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은 작품을 예술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이 어떻게 예술이 되냐고도 하지요. 또 누군가가 만든 작품을 파손하는 것 이 그들이 표현하는 예술이라고도 하고 tv브라운관 안에서 똑같은 메시지가 반복되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 또한 작품이라고도 하고요.
한 유명 연예인이 작가가 되어 작품을 전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었을 때 다른 한 편에서는 그가 하려는 예술이 무엇인지, 그냥 자신을 표현한 것뿐이지 예술이지 맞는지 의문을 두며 설전하는 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며 예술은 정해지지 않은 학문이고, 답이 없는 것,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껴지게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만드는 이가 그것을 작품이라 여길 때, 비로소 먼저 작품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구요. 이렇게 예술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단어이지 않을까요?
저는 많은 사람들과 흙의 따뜻함을 나누기 위해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기 전엔 공방이나 다른 공간에서 다양한 분들과 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클래스를 운영을 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두려운 요즘은 온라인으로라도 나눠보자며 이 방법, 저 방법을 고민하고 있답니다. 어느 수업이든 손재주가 없는데 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사용할 수 있을 까요?라고 묻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려요. “작가의 의도 아시지요? 답이 어디 있어요! 만드는 작가가 하는 것이 답이고, 누가 뭐라 하면 말씀하세요, 작가의 의도입니다! 처음 생각했던 방법으로 사용 못하면 어때요 어떻게든 쓰면 되지!”
흙이 도자기가 되기까지는 참 많은 손을 거치고 파손될 수 있는 변수들을 이겨냅니다. 말랑한 흙이 형태를 갖추기 까지만 해도 흙이 굴려지고 쌓이고 깎이고 또 깎이고, 뚫리기도 하고 스펀지로 다듬어지기도 하면서 굉장히 다양한 손이 필요하지요. 이렇게 형태를 갖춘 흙이 바람과 적당한 온도를 만나 안전하게 건조가 된 후에 또 한 번 깎이거나 다듬어지고 첫 번째 가마에 들어가 800도가 되는 온도에서 견디게 됩니다. 이온도에서 견디지 못한 흙은 가마 속에서 터지기도 하고 금이 가기도, 틀어지기도 하지만 이온도를 견뎌서 나온 흙은 반짝이는 도자기가 되기 위해 또 한 번의 성형과정을 거칩니다. 예쁜 색의 옷을 입기도 하고 또 한 번 깎이기도 하고 거친 사포로 다듬어지기도 하며 저마다 예쁘게 장식을 합니다. 그리고 광이 있거나 광이 없는 유약이라는 옷을 입고 또 한 번 뜨거운 불에 들어갑니다. 1000도 이상 되는 불에 말이지요. 이 불에서 살아남은 흙이 우리가 평생 두고 볼 수 있는 도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도자기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흙이 수많은 손을 거치고 깎이고, 장식이 되고, 괴롭고 아프지만 뜨거운 시간들을 거쳐 단단한 도자기가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너무나 많은 손들을 거쳐 아름다운 내가 되었고, 괴롭고 힘든 단련의 시간들을 견뎌 지금 누군가의 또 다른 부모가 되어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이 작품이고 또 다른 작품을 다듬고 있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집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에요. 갓 25개월이 된 첫째 아이와 이제 막 태어나 한 달이 지난 둘째 아이와 낮잠시간을 계획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의 육아가 항상 마음처럼 된 적이 있답니까? 한 명이 잠들면 한 명이 울고, 한 명을 달래 놓으면 다른 한 명이 우는.. 처음으로 아이 둘 육아의 처참한 현장을 맛보았지요.
결국, 아직 바운서 박자가 어색한 둘째 아이지만 첫째 아이를 태울 수 없으니 첫째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둘째 아이를 바운서에 태워 발로 바운서를 움직이며 둘을 재웠답니다. 옷은 잠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입으로는 자장가를, 한 발은 첫째 아이가 잠들 수 있는 박자를 타며 위아래로, 한 발은 바운서를 움직이며 있는 저의 모습을 보니 울음 섞인 웃음이 피식 나오더군요.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모든 감각들이 움직여 아이들을 재우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예술 아닐까요?
아주 유명한 포토그래퍼가 외국의 빈민지역을 가서 인물 사진을 찍듯 우리의 육아현장을 촬영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유명한 작가가 우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가정해보는 거예요. 새하얀 갤러리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모습이 담긴 모습들이 깔끔한 액자에 걸려있다고 상상해 보는 거예요. 감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 피곤한 모습,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 한쪽에서 장난감을 어지르고 있는 아이와 장난감을 치우고 있는 나의 모습 등 우리의 일상의 모습들이 갤러리 안에서는 느낌 있는 작품이 되어 있고 누군가는 그 작품들을 예술이라 말하겠지요.
우리는 육아라는 예술의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누군가의 소중한 작품이기에 가능한 예술이지요. 매 순간이 즐거움을 표현하는 예술이 아닐지라도 좋아요. 예술은 느끼는 사람의 감정이 중요하고 만드는 사람의 의도가 중요하니까요! 육아라는 예술의 작가이자 작품이 되고 있는 나 자신이 이미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미 예술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이들과 함께하는 예술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쌀을 만져보며 위에서 아래로 흘려보는 것, 집에 있는 화분의 잎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패턴을 찾아보는 것, 집에 굴러다니는 수성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물을 뿌려보는 것, 양치질을 하다가 거울에 튀는 치약을 보는 것 등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해 볼 수 있지요.
10년이 넘게 아이들과 도예와 창의미술 수업을 진행하면서 만나온 학부모님들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엄마아빠가 그림을 잘 그리니 너도 잘 그릴 거야! 라며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부모님들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 못하니깐 선생님한테 잘 배워~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무엇이지? 만들기를 잘하는 것은 무엇이지? 우리 아이의 그림이 피카소의 그림들처럼 사람 눈과 코가 방향을 한 곳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럼 못 그리는 것인가 아니면 예술적인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 예술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과 같이 아이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고 엄마들의 생각은 다 다르지요. 그리고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잘 만들고 못 만드는 것 역시 정해진 수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 생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한 것들이 아닐까요. 이미 소중한 작품인 우리의 아이들의 생각이 표현되는 것, 이미 소중한 작품인 우리가 그것을 바라봐 주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사전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인 예술이 아닐까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예술 활동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음이 예술이고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