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막 태어난 지 36개월을 채운 아기의 엄마다. 워킹맘으로, 매일 3시간 이상의 출퇴근 시간을 소요 해야 하는 통근러로서 아이를 하루에 2시간도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그리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내가 맞닥뜨렸던 이벤트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알음알음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며 공감을 얻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예비 엄마, 그리고 엄마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기이다. 시어머니 찬스로 육아를 이관한 채 복직한 지 어느덧 만 2년이 되었다. 이미 출산한 지는 3년. 그렇기에 임신했을 때, 그리고 출산했을 때 경험했던 다양한 이벤트들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더군다나 너무나 순조로웠던 신혼 4개월 만의 임신과는 달리 나에게 임신 기간과 출산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고, 감내하느라 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벤트들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인생을 서른 남짓 살아오며 웬만한 이벤트들에는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 자만했던 것일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시작하게 되면서 겪은 매 이벤트들마다 정말 쉽지 않았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라는 말을 핑계로 내놓기에는 뒤따르는 책임과 결과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엄마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지만 특히 겪을 수 있는 건 거의 겪은 내 경험을 토대로 ‘그’ 시기의 이벤트들을 회고하려고 한다.
1화 🤮 임신의 시작과 입덧: 화장실마다 영역 표시하는 기분이었달까
나는 결혼생활, 임신과 출산을 TV로 배웠던 대한민국의 흔한 여성이었다. 입덧 또한 드라마에서 여성 출연자가 임신을 자각하는 증상으로 한 두 번 봤던 게 내 이해의 수준이었다. 때문에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하루에 몇 번씩이고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풋풋했던 신혼 4개월 차. 내 주변에는 정말 너무도 많은 사람이 난임을 겪었기에 나는 지레짐작으로 ‘나도 난임이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사극도 아니고 합방일을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험관까지 그 지난한 과정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임신이란 건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나에게 우리 아이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는 현재 버전이고, 남편과 내가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을 때 우리는 정말 벙쪘다. 이제 엽산을 막 먹어보려고 한 보따리를 사다 뒀는데…
어른들이나 선배들한테 들은 임신에 관한 근거 없는 지식 중 신기하리만치 나한테 똑같이 일어났던 경험을 소개한다. 먼저 임신 확인을 위해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녔다면 첫 번째 병원에서 말해준 출산 예정일이 더 정확하다는 것. 그리고 입덧은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
출산 예정일에 대해 말하자면 임신 테스트기만 확인해 본 상태로 친정집에 가다가 들른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실히 알게 된 후 들었던 출산 예정일, 그리고 나서 정했던 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말해 준 출산 예정일, 둘 사이는 일주일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런데 정말로 첫 번째 병원에서 말해 준 날에 정확히 진통이 시작됐다. 친정 근처 산부인과에서 아기집과 난황(난황이라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임신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을 확인하고 아기가 나에게 온 지 7주 차라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는 친정에 도착해 엄마에게 얼떨떨하게, 그리고 뭔가 쑥스럽게 임신 사실을 공개하면서 ‘난 엄마랑은 다른가봐, 입덧의 기미도 없이 밥이 잘 들어가는데?’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나를 출산할 때까지 입덧을 했다. 엄마는 ‘그럼 다행인데, 임신한 걸 안 순간부터 입덧을 시작하더라들?’했다. 그랬다. 내 몸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주변에 임신과 출산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는 아니고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입덧에도 여러 종류와 강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먹덧, 토덧이었다. 무슨 의미냐, 먹어도 토하고 안 먹어도 토한다는 의미다. 먹으면 토하는 건 대부분 예상할 수 있지만 안 먹어도 토하는 건 왜 때문인건지… 다행히 냄새에 민감해져 속이 안 좋아지는 입덧은 없었는데… 다행인건가… 아무튼 속이 비면 노오란 위액을 토하게 되었다. 아침에는 속이 빈 상태에서 양치를 하게 되니 양치덧은 덤. 이를 두고 주변에 음주를 깨나 즐겼던 입덧 경험자들은 딱 과음한 다음 날 보게 되는 광경이라고 했다. 입덧은 그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이렇게 음주를 즐기지 않는 나는 숙취라는 삶의 경험치를 +1 하게 되었다.
먹덧은 배고프면 또 울렁거리기에 식사 시간에는 충분히 먹었다. 특히 이 시기에 나는 고기가 당겼다. 흔히 고기가 당기면 아들, 샐러드 같은 채소가 당기면 딸이라고 하던데 나는 딸을 낳았다. 3일 연속으로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기를 포함한 모든 음식으로 인해 이내 속이 불편해졌고, 토를 할 때면 위장에서 입까지 연결된 둥그런 터널을 통해 음식물 쓰레기(모두 섞여있으니)가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위액이 터널을 지나가니 속쓰림은 함께였다.
토하는 게 힘들어 뭐라도 입에 넣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간식을 시도했다. 울렁거림에는 역시나 신 게 효과있어서 편의점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신 젤리를 섭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터득한 요령은 참크래커 먹기.(크라운 감사합니다.) 어느 블로거가 제안했던 ‘임신 중 편안하게 토하기(?)’의 여러 방법 중 참크래커를 먹는 게 나와 잘 맞았다. 보기에도, 냄새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 업무 중 쉽게 구매가 가능하고 그나마 부드러운 토사물이 넘어온다는 것,
이러한 입덧 증상을 가지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아마 한 번의 노선으로만 도어투도어(door to door)가 가능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는 출근, 버스와 지하철과 기차를 네 번 갈아타는 퇴근 경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지하철과 기차는 그나마 화장실을 바로 이용할 수 있지만 광역버스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쉽게 이용할 수 없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사(feat. 고속터미널역)의 화장실에서 토를 할 때면, 다시 말해, 수많은 엉덩이가 지나간 변기통에 얼굴을 들이밀어야 할 때면 눈에 서러움이 차오르곤 했다. 갈아탈 때마다 화장실을 들르면서 든 생각은 ‘이렇게 또 영역 표시를 하게 되는구나…’ (지금은 고속터미널역 화장실이 리모델링을 해서 좀 나아졌더라.) 이때 당시 회사 사람들은 내 얼굴이 잿빛이라고 했다.
지하철 화장실까지 갈 수 없어 이내 플랫폼 근처 쓰레기통에 토를 하고 말았던 날(청소하시는 분께 정말 죄송합니다…). 어찌나 얼굴에 압력이 가해졌는지 결국 안구에 실핏줄이 터지고 말았다. 친정엄마는 나더러 유난스럽다고 했다. 임신은 너 혼자 한 것 같다고… 나도 회사에서 임신을 경험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기에, 이미 애를 여럿 낳고 멋지게 워킹맘 생활을 하시는 선배들이 계시기에 처음 겪는 이 과정을 그들처럼 의연하게 겪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아, 중간에 산부인과 선생님께 입덧으로 인한 괴로움을 말씀드렸더니 입덧약을 처방해 주셨다. 왜 진즉에 말씀해주지 않으셨는지 굉장히 야속했다. 입덧약은 보험이 안 되어서 8만 원 정도로 굉장히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 알 먹고 거의 바로 토했다. 변기에 둥둥 떠다니는 알약을 본 순간,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았고, 그대로 8만 원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래도 한 주, 두 주 지나고 나니까 어느덧 임신과 입덧에 적응이 되었다. 실핏줄이 터지지 않도록 얼굴에 압력을 조절하게 되었고, 비교적 깨끗한 화장실을 찾았다. 앞서 말했듯 덜 역겨운 간식도 발견했다. 12주 ~ 15주 정도면 잠잠해질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한껏 기대했던 내 바람과는 달리 내 입덧은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약 21주 정도에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던 그 속도를 비로소 멈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