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챌린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엄마를 이해하기
랄랄라가을
7달전

엄마는 정말 치열한 삶을 살며 나를 키우셨다.

그나마 변변찮은 수입을 가져다 주던 아빠와 이혼을 하고 난 2000년대 초반 엄마의 한달급여는 대략 120만원 남짓 이었는데, 엄마는 그 돈으로 엄마, 언니, 나 이렇게 세 식구 한달 내 먹을 장을 보고 그 외에 각종 공과금을 냈다. 당시 학기당 등록금이 300만원을 조금 넘었으니 연간 가계 지출 중 내 등록금으로 나가는 돈은 대략 600만원. 당연히 그 금액을 오롯이 엄마 혼자 부담하기엔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등록금을 메꾸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아이스크림 가게 , 빵집, 레스토랑, 죽 집, 패밀리레스토랑 ... 아르바이트에 장소와 직종을 구분 했던 적은 없었다.

무조건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아르바이트 중 수입이 가장 좋았던 직종은 백화점 판매원이었는데 운 좋게 얻은 자리는 아니고 당시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던 엄마의 도움을 살짝 받았더랬다. 이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백화점근무에 대한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우선...백화점 일은 정말 고되다. 식사시간 이외엔 앉지 못하고 10시간 이상 서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제일 힘들었다. 저녁만 되면 종아리에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고 신발 속에 욱여넣은 발은 퉁퉁 불어 퇴근할 때 즘이 되면 양말 너댓장을 덧대 신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엄마는 이 일을 시작한지 햇수로 14년차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엄마와 함께 일을 하고 난 순간부터 나는 엄마가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엄만 하루 종일 다리가 부르트도록 악착같이 일하고도 집에 와선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게 청소를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면 베란다를 활짝 열고 이불을 털고 온 집안을 뒤집어 쓸고 닦은 뒤 사방의 벽지를 젖은걸레,마른걸레 순서로 한번씩 닦았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빌라(당시 우리의 거처였던-)의 계단청소를 도왔다. 

그녀는 정말. 원더우먼이었다. 지난 삼십팔년간 엄마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단 하나는 바로 '나태함'이다. 나는 엄마가 슬픔에 못 이겨 주저 앉아 울거나 술을 잔뜩 마시고 몸을 비틀거리거나 혹은 우울한 안색을 띄는 것조차 본적이 없다. 언제나 당차고 씩씩한 우리 엄마. 그것은 엄마가 태어날 때부터 장착한 엄마만의 굳건한 기질적 측면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나는 존경했다. 엄마의 삶은 파란만장 했지만, 삶을 이겨내고자 하는 엄마의 역동적인 모습은 내게는 꽤 인상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어린시절 사람들이 '네가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외적으로 엄마를 많이 닮았다. 심지어 나이가 들수록 더 닮아간다. 언젠가 언니가 "야, 너는 웃음소리도 엄마랑 똑같아진다" 라면서 웃으며 말할 정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닮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엄마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우습게도 내가 아이를 낳고 난 뒤 부터다. 아이를 낳고 지겹도록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신생아 시절 아가는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이 네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혹은 동시에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바쁜 와중에 틈만 날 때면 놀랍도록 집중적으로 자아성찰을 했다.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둘러싼 세상에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으며 행동했는지. 그것이 대체 어떤 기저로 인한 결과값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싫어하는 나의 파편들의 기저엔 '엄마'가 있었다. 

엄마와 나는 사실은 잘 맞지는 않았다. 엄마 앞에만 서면 난 늘 주눅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생각들과 행동들을 쓸데없다고 치부해버리는 엄마의 모습이 생각 난다. 엄마는 늘 나에게 한탄 섞인 잔소리를 했다. "으이구 니가 하는게 그렇지 뭐." " 또 니가 그랬지?"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시끄러 노래 좀 부르지마" 나는 이런 말을 숱하게 들어며 살았고 그러다가 정말 그런 아이가 되었다.

내 말과 감정을 들어주지 않은 채 지나간 무수한 시간들...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무슨 일에 앞장서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려 끈질기게 노력했다. 간혹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끌려다니는 연애를 했다. 

물론 엄마의 발언은 나의 행동에 대한 결과값이다. 내가 청소를 잘 했더라면,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더라면. 지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나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춘기 시절 부모의 이혼에 비뚤어 진 적이 없다. 제일 중요한 시기에 학원을 다니지 못했지만 단 한번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성적을 받아본 적은 없다. 내 성적은 오히려 상위권에 가까웠다. 쾌활한 성격으로 엄마에게 적극적인 애정표현도 많이 했으며 열심히 일해 학비를 벌었고, 남은 학자금 대출은 스스로 갚았다. 그 와중에 엄마에게 단 한번도 아쉽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렇 듯 무수히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엄마에게 칭찬받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만약 그때 엄마가 나에게 "엄마는 너가 이런 행동을 하면 속상해 (방법)처럼 해주면 어떻겠니? 엄마는 널 믿어" 라는 등의 육아서에 나올만한 말을 많이 해 주었다면. 청소하는 시간을 줄이고 내 눈을 보며 매일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그렇게 나에게 무한한 긍정의 의지를 심어줬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내가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 나의 파편들의 기저에서 엄마를 만나고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엄마처럼 자식의 가능성에 한계를 긋고,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고, 모른체 방임하지 말아야지. 

이렇듯 내가 현재 바라보는 '엄마'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다만 나이를 먹을 수록 나는 엄마가 '나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보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삶에 대해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엄마가 조각 조각 이야기 해주는 유년 시절을 이어 붙여 보면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땐 식모살이를 간 적도 있다. 중학교에 갈 돈이 없어 운동부에 입소해 운동을 하며 학교를 다녔고 그나마 그 운동부마저 부진한 성적으로 폐지가 되자 엄마를 안타깝게 보던 당시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고등학교 입학금을 대신 내 주어서 간신히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당연히 대학은 꿈도 못꾸었다. 졸업 후에는 막 의류 사업을 시작한 외삼촌에게 노동착취를 당했다. 외할머니는 그닥 인자하신 분은 아니었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들은 유일한 칭찬은 "동그랑땡에 들어갈 당근을 참 잘 써는 구나" 였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깨달은 삶의 팍팍함으로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내어 주지 못하게 되었던 것일까. 가부장적인 할아버지와 다정하지 않은 할머니 밑에서 맏딸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았을까.

무능한 남편, 쌓인 빚, 사춘기 딸 둘. 눈 앞에 닥친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도 분명히 있었을 것 이다. 엄마와 함께 살 땐 이정도로 깊게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취업을 한다는 핑계로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엄마와 떨어져 따로 산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자연스럽게 한 발자국 멀어져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모녀사이는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하다.

몇 년 전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손녀의 입원 소식에 지방에서 한달음에 올라온 엄마.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자 마자 또 잔소리를 쏟아냈다.

"1인실이 얼마나 비싼데 1인실로 입원을 했니? 돈 새는 소리가 서울 밖까지 들린다 야. 너 어렸을 때 부터 허투로 돈 쓰던 버릇 여즉 못고쳤니?" 예전이었으면 덩달아 언성을 높였을 터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했다. "엄마 실비에서도 받으면 되고 입원비 일당도 있어서 괜찮아 걱정하지마" 엄마는 뭔가 더 할말이 있어보이지만 이내 "음... 그러냐" 하고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서로가 조심스러워 진 탓일 것 이다.

그 누구보다 가깝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상처 줬던 사이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왔음을 느낀다. 문득 한 때 유행했던 드라마에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잘 몰랐다" 엄마도 분명 잘 몰랐으리라 모성이라는 본능으로 나를 사랑했지만 어떻게 나를 사랑해아하는지, 어떤 식으로 나와의 교류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나는 이제 엄마에 대한 원망 섞인 마음을 중화시켜보려 한다. 동시에 반어적으로 이런 생각도 한다. ' 나는 엄마 처럼은 딸을 키우지 않겠노라' 라고. 

다만 이 글의 말미에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 험한 세상에 환경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날 키워줘서 고마워. 날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그래서 내 딸과 나를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다음생이 있다면 환생이라는 것이 실제 한다면 다음 생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길. 엄마가 받지 못한 지난 사랑, 꾹꾹 눌러 담아 내어줄테니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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