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년 전에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 중국 부동산 개발 회사의 제주 지사에서 중국어 통번역직으로 근무했는데, 제주와 육지를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제주에 정착하면서 운이 좋게 취업한 회사였다. 입사 2년 차가 됐을 때 회사에서 진행하던 개발 사업이 여러 가지 문제로 중단 위기에 처했고 1년을 힘겹게 버티던 회사는 직원들을 차례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도 입사 2년을 채우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 나와 동료들은 조만간 회사를 나가야 할 때가 올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후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각자만의 대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나는 그즈음 내가 평생의 업으로 여겨왔던 중국어 통번역에 대해 깊은 회의감에 빠져있었다. 대학부터 중국어를 전공했고 이후 오랜 시간 이를 업으로 살아왔던 나였다. 대부분 프리랜서나 인하우스로 통역과 번역, 그리고 강의를 하면서 밥벌이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연애 끝에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진입했듯이 내 직업도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데 입사 1년 차쯤 내 일이 지긋지긋해졌다. 프리랜서로 통번역 일을 하면 언제나 중간자 혹은 제3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업무 당사자들이 겪는 이해관계의 고충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일이 드문드문 있다는 단점이 있다. 당연히 수입도 들쭉날쭉이다. 반면에 인하우스 통번역직으로 일하면 따박따박 월급을 받을 수 있지만 소속 기업의 이해 당사자가 되므로 업무에 좀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제주에서 근무했던 회사는 바로 그런 점에서 힘들었다. ‘아, 저 말은 정말 통역 안 하고 싶은데…’ 싶은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그 어떤 직장과 직업에도 일의 기쁨과 슬픔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당시의 나는 내 업 자체에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던 것이 바로 온라인이다. 우연히 친한 친구가 블로그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시작한 블로그로 내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온라인은 그저 검색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내가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창업 및 창직 활동을 알게 되면서, 나도 어쩌면 내 일을 온라인으로 연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남이 주는 일만 할 수 없다, 난 나만의 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온라인 수익화를 위해 다양한 강의를 듣고 또 시도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남들은 그 정도 시간이면 눈이 동그래질 만큼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하던데, 나는 아직 매번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할 만큼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있다. 많은 도전과 실패가 있었고, 종종 경로를 수정했다.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삽질을 할 테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나는 3년 전보다 맷집이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좀 더 명확해졌고, 한 번뿐인 인생, 이왕이면 재밌게 살자면서 유의미한 삽질을 계속하고 있다.
반나절 제주 워케이션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난 평소에 일하기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대부분 혼자 일하는데, 두 달 전부터 SNS에서 함께 할 사람을 모아서 월 1회 반나절 워케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워킹맘이지만 내가 교류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내 또래의 워킹맘이기 때문에 반나절 워케이션은 우리에게 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평소에 워킹 공간을 서칭하면서 ‘아, 여기는 진짜 숙박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을 종종 만난다. 그런 곳은 늘 지도 앱에 저장만 해두고 아쉬워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냥 저지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 나타났다. 바로 ‘월요병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워케이션 플랫폼 디어먼데이(Dear Monday)’의 제주점이었다.
디어먼데이는 워케이션을 위한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경남 통영에 마련한 워케이션 공간 정보를 SNS로 종종 접했던 곳이다. 친정 부모님이 통영으로 이주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 친정에 가면 자유 부인권을 얻어 혼자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곳이라 홀로 내적 친밀감이 매우 높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SNS를 보다가 제주점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봤다. 게다가 오픈 특가로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니… 스르륵 홀린 듯이 결제를 해 버렸다. 토일 1박 2일로. 그러고 나서 현실 자각 타임. 그야말로 선 결제, 후 고민. 아… 주말인데 애들은 어쩌지? 2인 스테이인데 누구랑 같이 가지?
일단 아이들은 주말이니 남편에게 토스! 자, 그럼 이제 스테이 파트너는? 일단 평일 동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피곤함에 찌들어 단 하루의 자유라도 갈망하는 워킹맘이어야 하고, 주말에 아이들을 맡길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에 조금의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점점 줄었다. 알잖는가. 우리 엄마들은 늘 그렇게 항상 무슨 사정이 많다. 분명히 ‘금방까지 사정이 없었는데 돌아서니 있습니다’가 되는 사람이 우리 엄마들이다. 그래서 아, 이거 혼자 갈 수도 있겠는데…하는 생각이 들던 순간, 누군가가 머릿속에 탁 떠올랐다. 바로 내 대학 동창이자 평소에는 서로 도통 연락을 안 하지만 누군가 소울 메이트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지체 없이 그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그녀. 날 온라인 세계로 이끌었던 그녀. 벌써 몇 년째 날 만나러 제주에 오겠다는 뻥카를 날리고 있는 그녀. 그래, 내 스테이 파트너는 박수진, 너다.
핸드폰을 들었다. 몇 개월 만에 통화해도 바로 어제 만나서 수다 떨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또 그렇게 통화를 했다. 내가 워케이션 숙소를 예약해 버렸는데, 두 명이 쓸 수 있으니까 딱 네가 오면 된다고 했더니 수진이는 늘 그랬던 것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너, 제주 온다고 한 게 지금 몇 년째냐, 이렇게 안 오면 또 한참 뒤로 미뤄진다, 숙소도 예약해 놨고 일정도 다 내가 알아서 모실 테니 넌 그냥 비행기표만 끊어라. 압박을 가했다. 아이들, 남편 그리고 일 때문에 차마 집을 떠나지 못하고 상상 속의 비행만 하는 네 속을 내가 왜 모를까. 이렇게 판을 다 깔아줘도 갈까 말까를 백 번 고민할 너다. 그러니 더 제주에 오게 하고 싶었다. 우리 딱 하루만 자유 부인하자. 딱 하루만 가족 이야기 말고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자. 딱 하루는 그래도 되지 않냐?
압박은 통했고, 수진이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 ➡ 램앤블랙(양고기 스테이크) ➡ 스위스 마을 상가와 카페, 혹은 사려니숲길(업무 전후 산책) ➡ 디어먼데이 제주점(워킹 & 스테이) ➡ 함덕 서우봉 & 함덕해수욕장(수영, 산책 등) |
드디어 수진이가 제주에 오는 날.
급하게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에 와서 일요일 점심때 가야 하는 바쁜 일정이었다. 터무니없이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야무지게 밀도 있게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제주공항으로 수진이를 픽업하러 가는데 남친과 데이트 가는 것처럼(응?) 설렜다. 가족의 여행이나 출장 등의 일정으로 공항 픽업가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친구 픽업은 드물어서였을까,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서 그랬을까. 아무튼 설렘을 가득 안고 만난 수진이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 계집애, 너 진짜 그대로다! 라는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 램앤블랙(양고기 스테이크)
저녁 식사 장소는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램앤블랙.
몇 년 전, 내 나름의 큰 결정을 앞두고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대부분의 경우 신중하게 결정하고 그 후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선택도 절망적으로만 느껴졌던 그때 수진이와 통화를 했다. 각자 결혼하고 먼 곳에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어주는 건 만남이 아니라 늘 통화였다. 언제나처럼 내 고민을 두서없이 쏟아냈고, 수진이는 잘 들어주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대부분의 고민은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상대만 곁에 있으면 스스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곤 하니까. 그렇게 긴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문자음이 울렸다. 수진이였다.
[내가 옆에 있으면 밥이라도 한 끼 사줄 건데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내가 많이는 못 보내고 10만 원 보내줄게. 그걸로 점집을 가든지 애들이랑 외식을 하든지 해라. 우울할 때는 마음껏 우울해하자. 그러다 보면 털고 일어날 날도 올 거야. 내가 옛날 다이어리 다 뒤지는 수고하지 않게 얼렁 계좌번호 보내라.]
눈물이 투두둑 흘렀다. 통화하면서 농담으로 어디 가서 점이라도 봐야겠다며 웃었는데, 진짜 나보고 점집이라도 가 보란다.
수진이는 내가 자존심 상해 할까 봐 걱정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기꺼이 그 돈을 받았고 정말로 점집에 갔다. 기껏해야 재미로 타로나 보던 내가 혼자 신점을 보는 곳에 갔다. 아침 일찍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가는 길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신점을 보는 공간 자체도 무서웠고, 내가 원하지 않는 답을 주면 어쩌나 두려웠다. 그런데 그날, 나는 무속인 선생님과 한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눴고, 또 울었고, 결국 내가 원하는 답은 듣지 못했지만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늘 기다렸다. 언젠가 수진이에게 10만 원짜리 밥을 살 날을.
네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늘 네게 고마웠지만,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수진이에게 멋진 제주 워케이션을 선물하고 싶었다.
램앤블랙은 그 시작으로 딱이었다. 제주라고 늘 흑돼지만 먹으라는 법 있나. 평소에는 잘 안 먹는 메뉴로 프라이빗한 느낌이 나면서 정성이 느껴지는 한 끼였으면 했는데, 마침 디어먼데이 제주점 근처에 양갈비 전문점이 있었다.
직원이 오픈 키친에서 먼저 양고기를 구운 뒤 한입 크기로 잘라서 개인 화로에 올려주었다. 고기는 잡내 없이 깔끔했고 부드러웠다. 늘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리다가 남이 잘 차린 밥상을 받으니 둘 다 신이 났다. 입도 눈도 마음도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 스위스 마을 상가와 카페, 혹은 사려니숲길(업무 전후 산책)
저녁을 먹고 나오자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고 숙소로 향했다.
디어먼데이 제주점은 제주시 조천읍의 스위스 마을에 워킹 라운지와 스테이를 오픈했다. 스위스 마을의 노랑 빨강 컬러가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덩달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해 질 녘의 스위스 마을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입실이 늦었기 때문에 워킹 라운지는 다음 날 오전에 가기로 하고 스테이로 바로 갔다.
건물 한 동을 셰어하우스처럼 룸을 나누어 쓰는 형태였고 방마다 도어락 장치가 되어 있었다. 1인실 룸을 두 개 예약했지만, 룸 하나에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준비해 간 잠옷을 나눠 입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홀짝이면서 그동안 쌓아 놨던 이야기를 했다. 일과 가족, 가족과 꿈, 꿈과 미래, 그리고 다시 일. 우리가 친구로 지낸 20년의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밤새 흘렀다.
➡ 디어먼데이 제주점(워킹 & 스테이)
이튿날 아침. 수진이가 12시까지 공항에 가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 워킹 라운지로 갔다. 컬러 스테이라고 적혀 있는 관리동에 디어먼데이의 워킹 라운지가 있었다. 늘 SNS로만 봤던 디어먼데이의 워킹 라운지가 제주에는 어떤 느낌으로 펼쳐져 있을지 궁금했다.
스테이도 좋았지만 워킹 라운지가 정말 만족스러웠다.
일단 조명, 테이블, 의자 등이 작업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특히 의자가 이거 무슨 브랜드야? 하고 찾아볼 정도로 편했는데, 휴게 공간에 놓인 리플렛을 보니 HAWORTH라는 브랜드였다. 일은 무조건 장비빨 아니겠는가. 편한 의자와 테이블 덕분에 일의 집중도가 팍팍 올라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번역 작업, 수진이는 글을 쓰면서 몰입해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층 라운지에서 바라보는 뷰가 정말 멋졌다. 바다뷰보다 초록뷰와 마을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쏙 들 거다. 창밖에 보이는 빨강 노랑 집들과 여기저기 핀 꽃들, 길게 누워있는 오름의 자태와 먼바다까지. 일하면서 머물렀던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더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래도 공항에 가기 전에 간단히 식사 겸 제주 풍경을 즐기기로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체크아웃했다. 그리고 차로 15분 거리의 함덕해수욕장으로 향했다.
➡ 함덕 서우봉 & 함덕해수욕장(수영, 산책 등)
베이커리가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 델문도는 다른 제주 카페와는 달리 아침 일찍 문을 열어서 좋다. 게다가 아름다운 함덕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늘 사람이 북적인다. 우리가 갔을 때도 사람이 많았는데, 그래도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간단히 요기하기에는 괜찮았다.
함덕해수욕장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서우봉이라는 오름과 연결되어 있어서 산책에도 그만이다. 서우봉 둘레길을 걸으면 아래로 함덕 해수욕장이 가까이 내려다보이고 계절마다 예쁜 꽃들이 가득해 무척 아름답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수진이에게 제주 자연을 보여줄 시간이 부족했는데,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을 산책하면서 수진이가 연신 “너무 좋다!”고 했다. 이런 좋은 곳에 가면 늘 가족이 생각나지만, 챙겨야 할 가족 없이 여유롭게 봄바람을 맞고 있으니 둘 다 얼굴이 봄꽃처럼 화사해졌다. 둘 다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데, 그 입에서는 “다음에 꼭 가족과 와야겠다”라는 말이 자동 발사되는 웃긴 현장.
하루, 아니 딱 반나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여행은 늘 아쉽기 마련이다. 짧은 워케이션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맛있는 것도 먹고, 일도 하고, 자연도 즐기고, 그간 못 했던 이야기도 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워케이션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둘 다 얼굴이 발그레했다. 다 합치면 하루도 안 되는 짧은 1박 2일 워케이션이 우리에게 불어넣은 신선한 바람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큰 힘으로 작용할 것 같다. 나도 수진이도 힘에 부치고 지칠 때마다 자이언티의 초콜릿처럼 이 워케이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먹으면 좋겠다. 수진아, 정말 반가웠어. 또 제주에서 보자! 다음엔 조금 더 길게!
💊 박영미 앰버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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