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엄마인 내가
좋은 엄마가 되려면
끊임없이 배워야 그 자격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허기졌습니다.
돌아보니 좋은 엄마, 완벽한 육아는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가치있고
앞서기만을 바라게 되는
현실의 문제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아이와 내가 있는 그대로 충분하며
그저 아이의 웃는 얼굴과 눈맞추며
현실의 행복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몇초안에 메시지를 보내며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 시대에 삽니다.
얼굴도 영상통화로 볼 수 있고,
원하면 언제든 목소리를 듣습니다.
소통과 교류가 편해진 시대인데
육아가 덜어려운지는
외로움이 덜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 요즘 엄마인 나의 일과는 이러했습니다.
SNS에 아이 사진을 채웁니다.
맘카페에 들어가 댓글을 달아봅니다.
유튜브로 좋아하는 예능을 보며 웃습니다.
이정도면 오늘의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주던 화면에서 나와
종일 아이와 함께하던 일과에서
궁금하고 어려웠던 것을 찾습니다.
요즘 인기 많은 육아 프로그램을 봅니다.
박사님이 금쪽같은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에게 해결책을 알려주십니다.
미숙한 부모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에게도 일부 보이는 것입니다.
더 미숙함이 깊어지기 전에 이 내용을 보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듭니다.
부모이니 노력하고,
부모라면 아이를 이해하라고 하십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맞는 말이지만
왜인지 버겁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좋습니다.
편히 앉아서 이런 중요한 정보도 알 수 있습니다.
노력하면 더 좋아지겠지요.
적절하다는 해결책을 들었는데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 나도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해야지.
내 아이를 사랑하니까
화도 내일은 덜 내봐야지, 다짐합니다.
일기에 꾹꾹 눌러쓰며 깊게 다짐합니다.
다음날
어제의 다짐과는 다른
‘어제와 같은’ 화를 내는
내 모습이 한심합니다.
배우고도 배운대로 하지 못해 후회하고
다시 배우고 다짐하고
반복되는 날이 많을수록
아이에게 더 미안하고
내가 못난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한번에 좋아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해결책도 맞고, 노력하며 조금씩 좋아진다는
박사님 말씀도 맞지만,
나는 왜 노력할수록,
아이를 위한 정보를 더 찾을수록 힘이 드는걸까요.
나도 나이가 들고, 아이에게 이렇다할만큼
뭔가 해 준 것 없이 아이가 커버리고 있습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만 이런 것인지 불안해집니다.
나만 놓치고 있는 것인지 알고싶어 집니다
엄마들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이런 불안을 서로 달랩니다.
어린이집 엄마들 모임에서도
맘카페에서도 여러 글을 올리고
아이를 향한 불안과
각자 위로를 주고 받으며 해소해보지만
왜인지 마음이 더 답답해져 갔습니다.
아이가 어려 먹이고 재우고,
놀이터에서 집에서 놀아주며
일과를 보낼 때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어느날 학창시절 썼던 일기를 보았습니다.
내가 학교를 다니며 생긴 일과
나의 느낌들, 나의 생각들
다짐이 담긴 글들
내가 읽은 책을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썼던 글들을 보니
그때 내가 어떻게 살기로 했던 것들이
지금과 변한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던 그 학창시절에서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나의 생각은 성장하지 않고 멈춘 것입니다.
요며칠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내가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지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식은 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은 순간 ‘아 맞아~ 좋다. 나도 해야지’
하는 긍정적인 마음만 일어났다가
머릿속에서 사라집니다.
지식을 얻고 실천과 나의 의견이 있어야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식들만 얻고는,
나는 왜 변하지 않고 계속 힘들지?
하고 답답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와 육아서 읽기를 멈추고
내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내가 원하고 필요한건 뭔지
나는 어떻게 살고싶은건지
내 아이는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지
내가 아이에게 정말로 해줄 수 있는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질문하고 참 오랜기간 고민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고 단순한 답을 내었습니다.
그럼 부모가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문득 공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함께 일했던 병사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성실하고 학업적 성취도 이룬
바쁜 군생활 속에서도 공모전이나
새로운 활동들을 도전적으로 해내가는
그럼에도 휴가때마다
어머니와 영화본 이야기를 즐겁게 이야기하고
동생을 낳아주신것이 늘 감사하다는
인성 바른 아이
빠듯한 병사 월급인데도
늘 주변사람들을 챙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사관은 병사 관리를 맡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면담을 했는데,
그 때 면담 내용과 더해서
부모님이 너를 어떻게 기르셨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대단한 비법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친구는
‘부모님이 무엇을 하던지 믿어주셨다’
라고 답했습니다.
너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운 것이
‘믿음’ 이뿐이라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선한 아이는
어머님이 본인이 화가 나실 상황에도 웃어주셨고,
자신을 늘 소중히 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도 자신들이 이렇게 자란 데에는
그 이유라는 하나라는 확신이 있어 보였습니다.
아이가 ‘내가 이런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이유’
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믿음과 밝은 마음을 주는 것.
이것이 ‘행복하고 편안한’삶을 아이에게 주는
방법이라는 답을 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내 아이에게
‘어떻게’ 믿음과 사랑을 주며
키울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물론 여느 책에 있듯이
나쁜 일들,
예를들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거나
자신이 위험해지는 일을 제외하고
아이 스스로 해 내려는
그 마음을 믿어주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았습니다.
아는것과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동떨어진 일이었어요
내가 가진 경험과
나의 착한면, 좋은 마음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는 일 조차
염려와 불안,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내야한다는 부담감과
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무기력해지는 일과에 금방 지쳤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내가 나의 불안과 조급함으로
육아를 그르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처음 고민을 하다보니 너무 막막했지만
내가 내 마음과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고,
그 막연한 답을 찾으려고
일단 사람 자체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인문학, 더 작게는 심리학을 조금 공부했고
철학은 혼자 공부하기에는 어려워
철학학교에 소속되어 공부했습니다.
철학으로 나의 생각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사람의 심리와 감정,
마음에 대한 공부를 하니 참 좋았습니다.
적어도 내 감정이 다양하게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지금 내 마음이 이렇구나’ 알게 되었고
‘저 사람은 저런 마음이 들겠구나’ 하고
알게 되니 조금은 편안했습니다.
그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기어다니고, 걷고, 뛰며
시시각각으로 자라고
매일이 다른 우리 아이를 보니
‘왜 사는가,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내가 지금 눈앞의 내 생활과
너무도 동떨어진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2년정도 했던 공부의 방향을 바꿔
유아교육과를 독학해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변화는
맞닥드릴때마다 놀라웠고
여기에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놓치면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급해 졌습니다.
발달이나 발달심리 등을 배우니
아이를 이해하기에는 좋았습니다.
이렇게 아이가 배울 ‘교육’에 대해
해박하게 아는 것이
든든한 육아를 할 수 있을듯했는데
이 공부만으로는
아이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는 부모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이에게 ‘믿음과 좋은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어려운 일들이
자꾸만 지식에 매달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 공부를 하면서도
이렇게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이어졌습니다.
웃는 일, 우는 일, 화나는 일 여러 날들이 아이와 쌓여 갔습니다.
아이를 위한 공부를 끊임없이 하는데도
내가 내는 화가 너에게 어떤 아픔과
영향을 주는지를 아는데도
화가 멎지 않았습니다.
아는 만큼 더 괴로웠고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아이에게 화를 내던 그 순간에
내가 어린시절 혼나고 억울했던 감정이
겹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때에는 화가 멈출 수 없이,
기어이 내 속이 후련할때까지
어린 아이에게 쏟아냈습니다.
아이의 일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의 속상함이 올라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때에 다시 알았습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구나. 오롯이 나구나.
내가 어릴 때에 듣고 힘들었던 감정을
내 아이에게 쏟아내고 있구나
나에 대한 믿음도
지식으로 채워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이런 화와 속상함의 원인을 알아야 하겠구나.
알게는 되었더라도 이미
아이는 상처받았고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글로 배운 행복과
좋은 교육과 가치를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와 동등하게 싸우는 나를 보고
많은 날을 실망해왔습니다.
결국 나는 나만 돌보면 되는 것이었다니
내가 아팠던 과거의 감정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는 엄마임에도
내가 예쁘다며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아이를 보니
너무도 미안했습니다.
이 아픔을 해결하자는
결론을 내고서
나의 상처를 돌보는 일은 이제 더이상 미룰수도
지체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아이의 입장을 이해해주며
화를 내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 육아가 괜찮겠습니까?
그게 진정 어른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되면서
모든것을 해결해 줄
중요한 열쇠를 쥔 듯 마음이 벅찼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어른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내가 건강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웃어주어야
아이도 건강한 웃음으로 자랄 것입니다.
이 글을 전하며,
일단 세상에 완벽한 엄마는 없고,
심지어 부족한 엄마들 뿐이니
안심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엄마도 사람이기에,
부족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 근거로
우리가 아이에게 화를 참기 어려운 이유는
‘모두 크고 작은 상처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 모두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님께 상처가 대물림 되기도 합니다.
또, 스스로 세상밖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다양한 상호작용을 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상처를 받으며 자랍니다.
과거의 상처를 느끼며 마주한 이상,
우리는 이것을 치유하며 성장할 것입니다.
둘째로 내 아이를 돌보는 일은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일이고,
‘충분히 지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나의 능력과는 별개로
여기저기 SNS나 육아서를 보며
남들이 달성해낸 것을 보고
내가 해 내야 할 일로 정합니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내가 완벽히 해 내는 것은 정말로 어렵겠지요.
잘못된 목표들이 크게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를 알려고 노력하며
나의 체력만큼,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
내가 할 수 있고 우선하고 싶은 일들을 정해서
자신에게 맞춘 속도로
내 아이에게 맞는 육아를 해 나갈 것입니다.
지치지 않고 충분히 뿌듯하며
아이의 웃음이 함께한다면 정말 행복하겠지요.
셋째로 우리 모두 아이를 돌보는 데에 있어서
‘불안’이 큽니다.
불안이 큰 이유는
아이를 낳고 돌보는 일이
태어나 처음 겪는 일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처음 겪는 어려움 속에
나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데
아이까지 내 손에 맡겨진 상황은
누구나 불안할 것입니다.
또한 환경적인 불안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장이나 전문가에게 만들어져서
상품으로 구매해야 하는 산업화로
내 손을 거쳐 야채 하나도, 옷 한벌도, 집도
내가 오롯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야하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니
아이는 내 손으로 온전히 기르기 어렵습니다.
이 야채는, 이 옷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이는 기관에서 어찌 지내는지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직접 보지 못해 모르는 상황에
뉴스는 나쁜 먹거리, 나쁜 기관, 나쁜 이웃들…
부정적인 소식을 들려줍니다.
나쁜 소식들은 쉽게 퍼져나갑니다.
입에서 입으로도
누군가가 걱정이 되고 보살피려는 의도지만
커지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사건 사고들
나에게 들려도 괜찮을지 묻지 않고 쏟아집니다.
모두들 마음이 참 피곤하고 힘들것입니다.
이렇게 많은것이 위험하고 불안하니
의심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행을 하고 싶어도 선뜻 손내밀기보다는
각자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우선하는지 모릅니다.
불안을 이용해
자본주의는 더욱 몸집을 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삶을 이어가지만,
우리가 해 낼 수 있는 방법들로
불안을 잠재우고,
불안으로 가려져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연결과
안전감을 가지고 육아할 것입니다.
나아가 육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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