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준다는 환상
우리 아이와의 놀이, 안녕하신가요?
놀이에 대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잘 놀아야 한다.
아이에게 있어 ‘논다’는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르다.
아이에게 놀이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고,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이며, 인내하는 시간이다. 또한 사물을 관찰하는 시간이고, 생각하는 시간이며, 표현하는 시간이다.
즉, 놀이는 배움의 시간이다.
아이에게 이렇게나 중요한 시간이거늘 나는 왜 이렇게 아이와의 놀이가 어렵고 피곤하기만한가?
육아를 하며 부모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점.
‘내가 아이와 놀아준다’라는 생각이다.
그로부터 고달픔은 시작된다.
‘놀아준다’
는 부모가 아이에 대한 시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내가 너와 놀아주는 것이라는 수직적인 입장에서 아이를 내려다보게 되니 아이와의 놀이가 유치하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같이 놀자’
는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곁에 앉아는 있지만 부모의 눈은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향할 때가 많다. 기계적인 대답을 반복하기도 한다. ‘자고 싶다’, ‘쉬고 싶다’, ‘눕고 싶다’는 생각에 고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누워서 보란듯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같이 논다’
이 말은 부모와 아이가 같은 눈높이에서 대등한 주체로서 주어진 상황과 놀이에 몰입한다는 개념이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함께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의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라는 것은 그 자체로 풍성한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함께 놂이 만들어낸 유대관계의 얼개는 어지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스스로를 거룩한 시혜자라 여기고 아이와 놀아준다고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매 순간 피로하고 지쳐 있다. 듣기만해도 눈이 감기는 수업을 억지로 듣는 학생처럼 아이와 마주하는 시간을 간신히 인내하고는
나는 꽤 괜찮은 엄마야 혹은 아빠야! 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묵은 하루들을 쌓아갔다.
나는 참 멋진 부모인데 왜 점점 힘이 들지? 아닌가 멋진 부모는 원래 힘이 드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꼬리를 이었다.
해갈이 되지 않는 답답함에 배우자와 함께 아이와 보낸 하루를 정산해보고 치열하게 반성한 끝에 도출한 결과는 의외로 심플했다. 그것은 바로
‘같이 놀자’
였다. 말이 참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같이 논다고 생각을 하니 뭔가 홀가분하고 신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무슨 대단한 놀이를 했던 것도 아니다. 놀이 자체가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다. 엄마, 아빠와 함께 논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에게는 훨씬 중요하니까.
육아와 놀이의 과정에서 힘들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으며 지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솔직히 나도 매일 내면의 사리가 쌓이는 기분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우리가 사람인데)
그럴 때에는 스스로를 보듬어 주면서 차분하게 놀아보자.
중요한 것은 ‘놀이’에 접근하는 방향성 자체이니까. 육아라는 항해에서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타륜만 잘 잡고 있다면 흔들림은 있어도 좌초는 없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가득 담은 만선은 반드시 행복이라는 항구에 도착하리라.
아이들은 모두 천재의 그릇을 가지고 있어서 그 놀라운 창의력으로 어른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른이 규칙과 틀에 속박된 존재라면 아이는 놀이의 틀 밖에서 놀이를 바라보는 초월자이다. 그들이 던지는 기발한 생각과 표현들로부터 배우고 감동받는 시간은 너무도 귀하다.
우리는 모두 3살이었고 4살이었으며 5살이었다.
다만 그 모습을 내면 깊숙한 곳에 묻은 후 어른이라는 겉옷을 입었을 뿐이다.
아이가 놀이를 하면서 보여준 미소와 웃음 소리는 내 속에서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어린이를 깨워주는 친절한 알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