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신어! 지금 안 나가면 버스 놓칠지도 몰라.”
현관문 앞에서 꾸물대는 아이에게 나는 계속 소리쳤다.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같이 덩달아 맘이 급해진 아이는 나에게 짜증 섞인 말로 대답했다.
“엄마! 나 지금 하고 있다고!”
“빨리하라고. 빨리. 늦는다니깐.”
아이의 속도가 성에 차지 않는 나는 계속 다그치고,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현관문 앞에서 재촉하는 실랑이. 이건 아이가 얼마나 커야 안 할 수 있는 걸까?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빨리빨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아이 입장에서는 빨리하는 상황일 텐데 내가 정한 시간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금세 마음이 조급해져서 자꾸 아이들을 재촉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의 재촉에 못 이겨 어느 날은 신발 한쪽을 마저 다 신지 못한 아이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끌다시피 하고 나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겉옷 입고 있는 아이들을 제치고 먼저 나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서 나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재촉하고 소리쳐서 아이들을 등원 버스 타는 장소로 데리고 나오면 막상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날이 많았는데 그때 서야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아이들에게 재촉하고 다그치기만 해서 미안했고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생각했다.
시간의 압박이 유독 심한 것은 나의 불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시간 강박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날이면 늘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였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시간 안에 꼭 도착해있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다. 늦으면 마치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함. 늦을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약속된 시간보다 5분~10분은 먼저 도착해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왕복 3시간 이상 소요되는 통학 거리에도 지각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어린 나는 그랬는데 육아하면서 매 순간 기다림이 필요한, 어떻게 보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게 당연한 아이들을 보며 시간 강박이 있는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보면 답답했고 속에서 불이 일었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강박적인 시간관념이 육아하면서 나의 마음을 광풍으로 몰아치게 할 줄은 몰랐다.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등원 준비로 바쁜 아침이었다. 나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고 나갈 시간이 다 되어가자, 마음이 다급했다.
아이들은 나의 눈치를 보며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게 평소 같았지만, 나의 재촉에 첫째의 반응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큰아이는 그날 처음으로,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