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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
방임육아 대물림의 끝. 본질육아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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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사랑하려고 낳는 것.

우리 엄마처럼은 키우지 말아야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게 맞을까?

아이를 임신하기 전부터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를 종종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 생각의 끝은. 

‘우리 엄마처럼은 키우지 말아야지’ 라는 단호한 결심도 함께였다. 

“주영이는 순했어. 옆집 아주머니가 이 집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안 들린다고 할 정도였어. 그 정도로 순했어”

“주영이는 엄마가 바쁘면, 혼자 구석에 가서 인형 하나로 오래도록 놀기도 했어. 호호호”

남들에게 자랑처럼 말하는 엄마의 말들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그 시절 엄마가 나를 생각하는 기특한 아이였다는 나는 실제로는 늘 엄마의 돌봄에 방치된 가엽고 불쌍한 어린아이였다. 엄마는 늘 바빴다. 그 시절의 맏며느리로서, 늘 편찮으신 시어머니와 농사일로 바쁜 시아버지를 모셨다. 우리 가족인 아빠와 나, 그리고 두 명의 동생. 몸이 편치 않은 시동생과 아직 중학생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시동생까지. 아홉 식구를 거느리는 대가족의 살림은 오직 모두 엄마가 일궈내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치여 살았고 지쳐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대식구 중에서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유년시절 동안 나에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건. 방치(방임)되었던 나의 쓸쓸한 기억이다. 

내가 결혼을 한 이후, 엄마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너희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어” 라며 후회와 한탄 그리고 미안함이 섞인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곤 하셨다. 나는 엄마의 고된 삶을 보고 자라왔기에 그 말을,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명확하게 내가 깨달은 것은 고되고 힘든 결혼 생활 속에서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이었고, 같이 결심한 한 가지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절대 방치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결혼 후 나는 다른 엄마를 만났다. 남편의 엄마, 시어머니였다. 

외동아들 하나만을 키워오신 시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지극 정성으로 키우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남편과 시어머니는 수시로 연락했고.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하시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셨다. 남편에 대한 모든 일상은 나와 관련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도 어머님이 다 알게 되었다. 나와 정반대로 살아온 남편, 그리고 우리 엄마와 반대인 시어머니의 관심(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과한)이 나는 숨이 막혔다. 

신혼 초, 홀로 계신 어머님을 뵈러 매주 남편과 어머님 댁에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머님은 늘 진수성찬으로 상을 차려 놓으셨고, 나는 수저를 놓고 상차림을 도우며 같이 밥을 먹었다. 어머님의 사랑은 음식을 통해 전해졌고 보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차려서 눈도 즐겁게 하였다. 군침이 저절로 돌고 맛도 좋은 음식들을 대접 받는 날이면, 나는 늘 과식을 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어릴 적 못 받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시어머님의 음식으로 채웠는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남편을 금이야 옥이야 키운 귀한 아들이기에 걸음마 할 때는 다칠까 봐 하루종일 안고 다니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들어갈 때는 아들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 뜬 눈으로 기다리시고, 직장을 다닐 땐 간식을 늘 손수 가방에 챙겨주시며 손수건과 볼펜까지 미리 꽂아주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이런 이야기들을 만날 때마다 늘상 하셨다.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게 어머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법 중 하나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귀한 아들 몸에 흉한 상처라도 생길까, 아들이 늦은 밤 술을 마시고 집에 못 찾아올까 걱정되었던 것이고, 인스턴트 간식보다 손수 싸준 과일 음료를 먹기를 바라셨고, 볼펜이 없어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 

결혼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났고, 나는 어머님에게 아이를 잠시라도 맡기는 것이 너무 싫었다. 우리 아이에게 어머님의 손길이 닿으면 내 아이가 숨 막히는 사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과잉육아, 과보호하는 방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머님이 남편에게 대하는 사랑 방식을 보면서 임신 전부터 이렇게 다짐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머님처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내 아이를 낳고 보니, 내가 다짐하고 결심한 대로 아이는 자라지 않았다.

친정 엄마처럼 방치하며 키우고 싶지 않았고, 시어머니와 같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스스로 경험하고 자유롭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좋은 말로 지나치게 허용된 엄마였으니. 아이를 조금은 방임한 육아방식이었다는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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