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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변했다

사춘기 아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아들이 변했다.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몸도, 행동도, 마음도 많이 변했다.

어린이에서 갑자기 청소년이 되어 버린 아들. 아들은 그렇게 어른으로 잘 성장해 가는 중이다. 하지만 엄마는 1년 전 그대로다.

아들이 해맑게 음모 소식을 알릴 때 이제 몇 개월 안에 아들이 나에게서 멀어질 거란 걸 예상했다면 아쉬움이 덜했으려나.

엄마는 아직 아이와 손을 잡고 걷고 싶고, 엉덩이를 토닥이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아이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싶다.

“아 쫌!”
“왜 느끼해? 제발 그만 좀 쳐다봐?”
“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나를 불러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라며 예쁜 목소리로 나를 귀찮게 하던 아이였다.

그때 실컷 봐둘 걸 그랬다. 지금은 내 아들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안다.

이제 멀어져야 한다는 걸.

***

법륜스님은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시기마다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세 살까지는 따뜻이 보살펴 주는 것이 사랑이고, 어린 시기에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삶의 모범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고, 사춘기에는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사랑이고, 스무 살이 넘으면 냉정한 마음으로 지원도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아니 아니 아니~~~~!!”

어눌한 발음으로 우는 아들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아이가 밤에 왜 수도 없이 깨어나는 건지 알 수 없어 애꿎은 기저귀만 갈아내다 보니 아침이면 방 한 켠에 기저귀가 열 개씩 쌓이기도 했다.

아이 몸에 조금만 열이 나도 아이를 들쳐업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렇게 매일 정답도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푸는 심정으로 지낼 때가 있었다.
세 살까지 아이를 따뜻이 보살폈는지 잘, 모르겠다. 죄다 허둥댄 기억뿐이니 말이다.

“육아는 같이해야지 자기는 왜 매일 편하게 TV만 보는데?”

나 대화법을 모르던 시절. 나는 화가 날 때면 남편에게 이렇게 쏘아대곤 했다.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도 전달하지 못하고 짜증만 전달했다.

나의 짜증스런 말투에 남편은 본인의 잘못과 나의 힘듦을 알아주기보다는 ‘또 시작이다’라는 생각으로 응수했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않았다고 자부하며 지내왔는데.

예민한 우리 큰아이는 그때 정말 잠들었던 걸까. 차갑고 무거운 공기를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큰아이가 어린 시절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삶의 모범이 되어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에 비해 잔뜩 날 서 있던 내 모습만 떠오르니 말이다.

작고 귀여웠던 큰아이는 벌써 열두 살이 되어 사춘기를 맞이했다. 가만히 지켜봐 주어야 할 시기란 걸 안다. 이제는 시기에 맞게 올바른 방법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어야 하며, 새벽마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엄마는 아이의 사랑스런 모습을 눈과 마음에 담는 대신 내 삶을 갈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제야 아이들에게 내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는 것이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아이를 멀리서 바라만 보라니.

매번 아이보다 한발 늦게 성장하는 어설픈 엄마는 다시 어렵다.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

지금의 나에겐 어쩌면 가장 어려운 사랑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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