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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교사
땅콩딱
1년전
나의 두 아이들에게하윤아, 너는 사랑의 씨앗엄마, 아빠를 연결해준 고마운 씨앗네가 움 틔우고 싹을 내는 시간 동안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 촉촉한 비가 널 감싸주었지활짝 피어 따뜻하고 시원하고 촉촉하게 세상을 감싸주는 사랑이 되길.호윤아, 너는 평안의 씨앗엄마가 가장 건강하고 넉넉할 때 만난 아이우리 가족 행복하고 단단히 다져줄 씨앗마음 넉넉하고 건강하고 든든한 너를 기다리며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어너라는 존재만으로 우리 가족 모두 평안하기를 기도해본다.————————————————————————나는 엄마다첫 아이를 낳았다휠체어를 타고 아이를 보러갔다아픔에 누워있다 퇴원했다그렇게 3년..아이를 또 낳았다이튿날 링겔대를 잡고 걸어 아이를 보러갔다저녁엔 가스가 나와 죽을 먹었다다음날 링거 없이 아이를 보러갔다젖이 불어 오르는 열 속에 유축을 했다내 몸이 알고 있다내 새끼들 곁으로 바지런히 가고 싶은 내 맘을나는 엄마다(2021.08.02)————————————————————————새벽 두시반. 자야한다는 걸 아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호윤이가 열이 난다. 38.8도. 해열제는 먹이지 않고 부랴부랴 열 내리는 마사지를 인스타에서 찾아 자는 아이 팔을 들고 기도하듯 이곳 저곳을 100번씩 만져주었다. 내일 어찌해야 하나. 근무를 해야하니 어린이집은 가야하고, 미리 내어놓은 육아시간이 있으나 3시에 데리러 가기엔 아이가 너무 걱정된다. 다시 기결취소하고 조퇴를 내야하나.. 자기전 끙끙대는 아이가 수상쩍어 보초를 섰더니 여지없이 열이다. 엄마들의 촉이란 참 대단하다. 그래도 다행히 식어가던 손발이 뜨끈해져간다. 손발이 차가워지면 열이 더 오른다는 신호라 더 촉각을 세워 지켜야 하는데 한켠 여기서 더 오르지는 않겠지 안심을 해본다. 9월 1일 복직을 했다. 육아휴직 중에는 “애 둘 엄마예요.”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이제는 엄마이자 교사인 투잡러가 되었다. 아직은 집에 와서 집안일 하고 밥 차리는게 내 본업인양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교사 옷은 왠지 어색한. 1학기를 마치고 그만둔 선생님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느끼며 매일 상담전화를 하고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학년은 2학년인데 고학년 생활지도 하듯 어제는 수업을 멈추고 한명씩 불러 개별상담도 했다. 한 아이는 늘 화를 달고 산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쉬라고 했더니 아무것도 못한다면서 화, 같이 왔다갔다 하다 실내화끼리 살짝 부딪혀도 화, 만든 것을 전시하고 두고 가라고 했더니 가지고 갈거라고 하며 화를 내곤 그냥 가버리기도 한다. 첫날부터 자기를 만졌다고 화를 내던 아이는 복직하고 3일째 되던 날 과제 하고 하교하라고 했더니 화를 내며 가방을 싸고 집으로 가버렸다. 수업 중에 화가 나면 갑자기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기도 한다. 아이의 화받이가 되어버린 나는 한켠으론 아이가 밉고, 한켠으로 계속 화를 내는 녀석이 안타깝기도 하다. 들어보니 1학기때 아이아 아파 엄마에게 연락을 했는데 데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도 아이가 버겁겠다 싶다. 매일 아침 8시면 학교로 오는 아이. 엄마도 도피처가 필요하진 않았을까? 어쨌든 그 아이의 영향력과 더불어 수업진행이 어려운 우리반 덕에 하윤이, 호윤이를 만나는 일은 더없이 수월하고 반가워졌다. 그런데 복직한지 4일째 되는 날부터 하윤이가 열이 난다. 광주에 계시는 시부모님이 오셔서 하루를 봐주시고 어찌어찌 주말이 왔고 일요일 강릉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도 받고 열이 잘 내리는 듯 해 월요일 유치원에 갔다. 배가 아프다며 보건실에 있던 아이가 설사를 하고 울고 난리가 났다. 급히 신랑이 조퇴를 하고 하윤이를 데리고 가며 걱정말라고 전화를 했는데 하윤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짓는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아무 생각이 안들었다. 전주 수요일부터 열보초 서느라 잠을 못잔 탓도 있으리라. 동학년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하다 왈칵 눈물이 나버렸다. 얼른 들어가라고, 당장 가보라며 전담 있으니 이날은 우리가 돌아가면서 봐준다고 가족돌봄휴가 다 쓰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러 배려속에 휴가를 쓰고 하윤이를 봤고 참 희안하게도 엄마가 도착한 그 순간부터 하윤이는 괜찮아졌다. 그에 이어 호윤이 중이염이 시작되긴 했지만. 집에 있는데 반 아이들 생각이 난다. 누구에게 부탁하기에 날선 녀석들이기에 잘 있으려나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돌아온 그날 보결 선생님이 잔뜩 써 놓으신 아이들 사건 기록을 보아야했다. 하하하하. 이건 교사의 촉인걸까? 매일 소리지르며 교사로서의 나를 시험하는 아이들임에도 서로에게 스미고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복직하고 보니 교사이자 엄마인 그녀들의 종종거림을 마주하게 된다. 오늘도 부장님은 아이가 아파 내일은 못나올 것 같다며 동학년 선생님들께 부탁을 하고 갔다. 그냥 그렇게 사는 일. 한켠으로 걱정했던 복직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일어나고 있다. 호윤이가 뒤척인다. 얼굴을 지푸리며 온 몸을 쭉 뻗는다. 핸드폰 후레시를 켜고 체온계를 켜 체온을 잰다. 38.9. 떨어져라 열아. 부디. 잘 이겨내자. 내 아들아. (09.20 새벽에)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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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
김*니카
1년전
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딸을 샤워시킨 후 딸의 머리를 말려주다가, 병설 유치원 다니는 딸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다가 갑자기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와 울컥할 때가 있다. 남들은 출산을 경험하고 엄마가 되면 친정엄마의 한없는 은혜를 깨닫고 엄마와 사이가 더 각별해진다는데, 나는 엄마가 되고서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평생 쉬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육체노동을 이어오며 책임감이 결여된 친정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린 엄마에 대한 고마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내가 사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서 엄마가 온 몸으로 노동하여 나를 길러준 것에 대한 심리적인 보상도 드리고 싶고,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의 육체적 노동도 멈추어 드리고 싶기에 지금도 여러가지 도전을 이어 오며 살고 있다. 이런 효녀 심청이인 내가 딸을 낳고 보니, 나 자신이 엄마가 되고 보니, 문득문득 엄마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서 당황스럽다. 아침 등원 전 딸의 머리를 땋아줄 때면 식당 문을 열기 위해 새벽 일찍 출근하여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언니와 내가 고사리 손으로 서로의 머리를 땋아준 기억이 난다. 병설 유치원을 다니는 딸아이의 도시락을 싸줄 때는 직접 도시락을 싸다니던 초등학교 3학년의 내가 떠오른다. 마침내 전국적으로 급식이 실시되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3년 내내 아침에 스스로 계란물을 입혀 햄을 굽고 비엔나를 구워 도시락을 싸던 기억이 떠올라 울컥할 때가 많아졌다. 내가 엄마가 되어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보니 7세인 내 딸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다. "너는 몇 학년이니?" "3학년이요." "아, 그래. 네가 3학년 이구나... …" 내 딸보다 겨우 한 뼘 더 큰 네가 3학년이구나. 이제 겨우 그네 줄을 야무지게 쥐기 시작할 무렵이 3학년인데… … 새벽에 알람소리 듣고 스스로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언니 것까지 도시락 2개를 매일 싸던 어린 내가, 겨우 저 그네 타는 아이만 했을 것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을 수록 마음이 더 깊어지고 철이 들어야 되는데 나는 어쩜 사춘기에도 없던 반항심이 마흔이 다 되어 올라오는 것인지… …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애썼고 그 당시 엄마로서는 아침 식사까지 맡아가며 식당을 운영했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지금까지는 늘 그렇게 이해를 했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피치 못 할 상황' 이라는 감정에 대한 호소가 모든 이성적 사고를 눌러왔기에 나는 엄마를 이해해주는 착한 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혼자서는 반팔 티셔츠도 스스로 벗지 못하고, 물 한잔 안 흘리고 스스로 잘 마시지 못하는 게 아이들인데, 어린 아이에게 나의 친정엄마는 너무 큰 짐을 지워준 것이 아니었나. 내 눈으로 어린 나를 마주하고 나니 자꾸 의문이 들었다. 단지 육아나 자식의 안전 따위가 엄마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책임감없는 아빠를 푸쉬하기 보다는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엄마 자신이 일선에 서서 생계를 해결한다는 변명으로 자식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을 자기합리화 한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는 선택’ 이란 것도 어쨌든 엄마가 주체적으로 결정 내린 선택이 아닐까? 이성이 감정을 압도하여 이런 질문들을 해대기 시작하자 원망과 분노가 솟구쳤고 아침마다 불 앞에서 고사리 손으로 도시락을 싸는 어린 내가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가게 때문에... 가게 때문에...' 여느 친정엄마들이 챙기는 딸들의 사사로운 경조사. 출산이라든지, 출산 후 몸조리 라든지, 자취할 때 부모님의 방문이라든지, 해외에서 들어올 때 공항에 마중을 나온다든지... ... 이런 종류의 살뜰한 챙김은 '가게 때문에' 여유가 없는 우리 친정엄마는 당연히 못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라는게, 과연 당연하게 존재하는걸까. 무언가를 당연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본인의 선택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평소에 자주 하다 보니 내 입은 통제력을 종종 잃곤 한다. 어느 명절 날 친정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만히 티비를 잘 보다가, 드라마에서 친정엄마가 결혼한 딸의 몸조리를 도와주는 장면을 보면 갑자기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는 것이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정말 열심히 산 것은 무조건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살뜰하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친정엄마 역할로 보면 엄마는 빵점이야.' 내 딸이 커서 늙고 힘이 없는 나에게 '이래서 나는 엄마한테 섭섭하고 저래서 원망스럽다.' 라고 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기도 같다. 그래서 나부터 친정엄마에게 마음을 곱게 쓰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걸 보면 나는 한참 모자란 인간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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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엄마를 이해하기
랄랄라가을
1년전
엄마는 정말 치열한 삶을 살며 나를 키우셨다.그나마 변변찮은 수입을 가져다 주던 아빠와 이혼을 하고 난 2000년대 초반 엄마의 한달급여는 대략 120만원 남짓 이었는데, 엄마는 그 돈으로 엄마, 언니, 나 이렇게 세 식구 한달 내 먹을 장을 보고 그 외에 각종 공과금을 냈다. 당시 학기당 등록금이 300만원을 조금 넘었으니 연간 가계 지출 중 내 등록금으로 나가는 돈은 대략 600만원. 당연히 그 금액을 오롯이 엄마 혼자 부담하기엔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등록금을 메꾸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아이스크림 가게 , 빵집, 레스토랑, 죽 집, 패밀리레스토랑 ... 아르바이트에 장소와 직종을 구분 했던 적은 없었다. 무조건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아르바이트 중 수입이 가장 좋았던 직종은 백화점 판매원이었는데 운 좋게 얻은 자리는 아니고 당시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던 엄마의 도움을 살짝 받았더랬다. 이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백화점근무에 대한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우선...백화점 일은 정말 고되다. 식사시간 이외엔 앉지 못하고 10시간 이상 서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제일 힘들었다. 저녁만 되면 종아리에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고 신발 속에 욱여넣은 발은 퉁퉁 불어 퇴근할 때 즘이 되면 양말 너댓장을 덧대 신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엄마는 이 일을 시작한지 햇수로 14년차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엄마와 함께 일을 하고 난 순간부터 나는 엄마가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엄만 하루 종일 다리가 부르트도록 악착같이 일하고도 집에 와선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게 청소를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면 베란다를 활짝 열고 이불을 털고 온 집안을 뒤집어 쓸고 닦은 뒤 사방의 벽지를 젖은걸레,마른걸레 순서로 한번씩 닦았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빌라(당시 우리의 거처였던-)의 계단청소를 도왔다. 그녀는 정말. 원더우먼이었다. 지난 삼십팔년간 엄마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단 하나는 바로 '나태함'이다. 나는 엄마가 슬픔에 못 이겨 주저 앉아 울거나 술을 잔뜩 마시고 몸을 비틀거리거나 혹은 우울한 안색을 띄는 것조차 본적이 없다. 언제나 당차고 씩씩한 우리 엄마. 그것은 엄마가 태어날 때부터 장착한 엄마만의 굳건한 기질적 측면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나는 존경했다. 엄마의 삶은 파란만장 했지만, 삶을 이겨내고자 하는 엄마의 역동적인 모습은 내게는 꽤 인상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어린시절 사람들이 '네가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굳이 따지자면 나는 외적으로 엄마를 많이 닮았다. 심지어 나이가 들수록 더 닮아간다. 언젠가 언니가 "야, 너는 웃음소리도 엄마랑 똑같아진다" 라면서 웃으며 말할 정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닮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엄마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우습게도 내가 아이를 낳고 난 뒤 부터다. 아이를 낳고 지겹도록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신생아 시절 아가는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이 네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혹은 동시에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바쁜 와중에 틈만 날 때면 놀랍도록 집중적으로 자아성찰을 했다.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둘러싼 세상에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으며 행동했는지. 그것이 대체 어떤 기저로 인한 결과값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싫어하는 나의 파편들의 기저엔 '엄마'가 있었다. 엄마와 나는 사실은 잘 맞지는 않았다. 엄마 앞에만 서면 난 늘 주눅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생각들과 행동들을 쓸데없다고 치부해버리는 엄마의 모습이 생각 난다. 엄마는 늘 나에게 한탄 섞인 잔소리를 했다. "으이구 니가 하는게 그렇지 뭐." " 또 니가 그랬지?"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시끄러 노래 좀 부르지마" 나는 이런 말을 숱하게 들어며 살았고 그러다가 정말 그런 아이가 되었다.내 말과 감정을 들어주지 않은 채 지나간 무수한 시간들...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무슨 일에 앞장서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려 끈질기게 노력했다. 간혹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끌려다니는 연애를 했다. 물론 엄마의 발언은 나의 행동에 대한 결과값이다. 내가 청소를 잘 했더라면,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더라면. 지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나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사춘기 시절 부모의 이혼에 비뚤어 진 적이 없다. 제일 중요한 시기에 학원을 다니지 못했지만 단 한번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성적을 받아본 적은 없다. 내 성적은 오히려 상위권에 가까웠다. 쾌활한 성격으로 엄마에게 적극적인 애정표현도 많이 했으며 열심히 일해 학비를 벌었고, 남은 학자금 대출은 스스로 갚았다. 그 와중에 엄마에게 단 한번도 아쉽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렇 듯 무수히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엄마에게 칭찬받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만약 그때 엄마가 나에게 "엄마는 너가 이런 행동을 하면 속상해 (방법)처럼 해주면 어떻겠니? 엄마는 널 믿어" 라는 등의 육아서에 나올만한 말을 많이 해 주었다면. 청소하는 시간을 줄이고 내 눈을 보며 매일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그렇게 나에게 무한한 긍정의 의지를 심어줬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내가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 나의 파편들의 기저에서 엄마를 만나고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엄마처럼 자식의 가능성에 한계를 긋고,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고, 모른체 방임하지 말아야지. 이렇듯 내가 현재 바라보는 '엄마'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다만 나이를 먹을 수록 나는 엄마가 '나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보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삶에 대해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엄마가 조각 조각 이야기 해주는 유년 시절을 이어 붙여 보면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땐 식모살이를 간 적도 있다. 중학교에 갈 돈이 없어 운동부에 입소해 운동을 하며 학교를 다녔고 그나마 그 운동부마저 부진한 성적으로 폐지가 되자 엄마를 안타깝게 보던 당시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고등학교 입학금을 대신 내 주어서 간신히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당연히 대학은 꿈도 못꾸었다. 졸업 후에는 막 의류 사업을 시작한 외삼촌에게 노동착취를 당했다. 외할머니는 그닥 인자하신 분은 아니었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들은 유일한 칭찬은 "동그랑땡에 들어갈 당근을 참 잘 써는 구나" 였다.엄마는… 어린 나이에 깨달은 삶의 팍팍함으로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내어 주지 못하게 되었던 것일까. 가부장적인 할아버지와 다정하지 않은 할머니 밑에서 맏딸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았을까.무능한 남편, 쌓인 빚, 사춘기 딸 둘. 눈 앞에 닥친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도 분명히 있었을 것 이다. 엄마와 함께 살 땐 이정도로 깊게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취업을 한다는 핑계로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엄마와 떨어져 따로 산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자연스럽게 한 발자국 멀어져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모녀사이는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하다.몇 년 전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손녀의 입원 소식에 지방에서 한달음에 올라온 엄마.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자 마자 또 잔소리를 쏟아냈다."1인실이 얼마나 비싼데 1인실로 입원을 했니? 돈 새는 소리가 서울 밖까지 들린다 야. 너 어렸을 때 부터 허투로 돈 쓰던 버릇 여즉 못고쳤니?" 예전이었으면 덩달아 언성을 높였을 터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했다. "엄마 실비에서도 받으면 되고 입원비 일당도 있어서 괜찮아 걱정하지마" 엄마는 뭔가 더 할말이 있어보이지만 이내 "음... 그러냐" 하고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서로가 조심스러워 진 탓일 것 이다. 그 누구보다 가깝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상처 줬던 사이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왔음을 느낀다. 문득 한 때 유행했던 드라마에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잘 몰랐다" 엄마도 분명 잘 몰랐으리라 모성이라는 본능으로 나를 사랑했지만 어떻게 나를 사랑해아하는지, 어떤 식으로 나와의 교류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말이다.나는 이제 엄마에 대한 원망 섞인 마음을 중화시켜보려 한다. 동시에 반어적으로 이런 생각도 한다. ' 나는 엄마 처럼은 딸을 키우지 않겠노라' 라고. 다만 이 글의 말미에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 험한 세상에 환경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날 키워줘서 고마워. 날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그래서 내 딸과 나를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다음생이 있다면 환생이라는 것이 실제 한다면 다음 생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길. 엄마가 받지 못한 지난 사랑, 꾹꾹 눌러 담아 내어줄테니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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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키우며 성장하고 있는 엄마
해피루피
1년전
결혼 후 3개월 만에 아기천사가 찾아왔습니다. 20대 후반, 전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한 생각으로 제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하며 사랑만 듬뿍 주는 엄마가 될 줄 알았습니다. 육아를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요. 아이를 낳은 그날,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퇴원 후 집에 와서 마주한 육아는 말 그대로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아이는 정말 예뻤지만 자고 싶을 때 못 자고 먹고 싶을 때 못 먹으며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바로 가지 못할 때가 많은 그야말로 내 기본권과 아이를 맞바꾼 느낌이었습니다. 초보엄마는 고군분투하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물론 몸이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 때가 많지만 아이로 인해 느끼는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데에 많은 부모님이 공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2살 터울로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아들이었습니다. 첫째는 동생에 대한 질투를 친동생보다 7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동생에게 다 한 덕에(?) 자기 동생에겐 질투보다는 예뻐하며 잘 챙겨주더군요. 그러다 6살 유치원 다닐 때 안 하던 질투를 하며 막무가내 고집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유모차로 동생을 태우고 첫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본인이 유모차에 타겠다며 고집부리는 일이 많아서 길에서 어찌나 씨름을 했는지 그 시절 아이에게 화내며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했던 일들이 큰아이가 12살인 지금까지도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얼마 전 아이에게 그때의 일을 얘기하며 사과했는데 아이는 기억도 안 난다며 쿨하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 자기 전 양치하던 큰 아들이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하며 물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게'라고 하기에 물건인 것 같긴 했지만 농담으로 "엄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정답!"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루의 피로가 씻은 듯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말 한마디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죠. 사랑을 표현해 주는 아들에게 고마웠습니다.2021년, 계획엔 없었지만 태명처럼 그저 '선물'같은 셋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주위분들은 "셋째가 딸이었어야 하는데" 하시며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면서 저를 안쓰러워하시지만 저에겐 셋째 아들이 하늘에서 보내주신 천사 같고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내 생각과 다짐과는 다르게 아이를 키우며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기에 셋째에게는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아이를 키우며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부모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느낍니다. 내가 낳은 아이라고 하더라도 성격, 기질, 성향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 같아요. 아이가 나와 같지 않을 때 답답함을 느꼈고 행동을 고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어려웠지만 아이가 떼를 쓸 때 그것이 들어줄 수 없는 부분이라면 이제는 최소한의 말만 하며 아이가 침착해지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불필요한 부정적인 감정과 화를 전달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지금의 내 모습대로 첫째와 둘째를 키웠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 과거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더 성장하는 부모가 되리라 다짐합니다. 저는 육아에 있어 '기다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마다 발달속도도 다 다르고 성향도 기질도 다 다르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이가 투정을 부릴 때에도 물론 당장 빨리 이 상황을 종료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며 아이를 기다려주는 태도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육아일기를 쓰고 있는데(중간에 안 쓴 기간이 있기도 해요.)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육아는 역시 기다림이었다."라는 말을 여러 번 썼더라고요. 아이가 기저귀를 뗄 떼도 아이가 손가락을 빨았던 문제도 아이의 식습관 문제도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기다리며 사소한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해결이 되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 또한 그랬고 많은 분들이 알면서도 실수하는 부분이겠지만 잔소리는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죠. 모든 인간관계에서처럼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잔소리가 아닌 대화는 참 중요하더라고요.최근에 "마음챙김"이라는 심리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감정이 생겼을 때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내 감정에 대한 이유를 알고 내 마음을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요. 육아를 하는 엄마에게는 이 "마음챙김"의 태도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아들을 키우며 참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횡단보도에서,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어르신들이 제가 아들 셋과 함께 있는 것을 보시고는 고생이 많다며 힘내라고 말씀해 주시고 토닥여주시기도 합니다. 처음 만난 분들의 그러한 한마디가 제게 힘이 됩니다. 그저 내가 낳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뿐인데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더 잘 키워야겠다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일, 육아를 하고 있는 다른 부모님께도 힘내시라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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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뛰게하는 존재의 힘
행복자
1년전
첫 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선 본지 한 달 만에 결혼하고 27년 살아온 고향을 떠나 타지로 와서 산 지 어언 22년. 뒤돌아 보면 눈 깜짝할 사인데 어느덧 내 옆엔 2남 2녀의 듬직한 자녀들과 한결같이 울타리가 되어준 착한 남편이 내 편이 되어있다. 허니문베이비로 찾아온 첫째 딸은 육아가 처음인 나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밤새 열이 나면 나도 밤을 세우고 아이의 자그만 반응에도 크게 반응하며 정말이지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지금은 예쁜 숙녀가 되어서 옷도 나눠입는 친구가 되었지만^^첫째가 동생을 기다릴 무렵 4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임 센터도 가보고 산부인과에서 날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5년이란 공백을 뚫고 보물처럼 찾아왔다. 아 이제 됐다...둘이면 됐다...여동생이니 친구처럼 지내겠지? 그런데 예기치 않게 들어선 연년생 남동생...어렵게 낳은 둘째라 셋째까진 생각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오니 당황스러웠지만 딸딸이 아빠라는 소리가 싫었는지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년연생은 거의 쌍둥이처럼 손이 많이 가고 힘들었다. 병원을 가도 마트를 가도 업고 끌고 주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 수밖에 없었다. 내 꽃다운 젊음이 사그러져 가는지도 모르고 자라나는 새싹에 물을 주며 꽃이 피는 기쁨과 행복으로 30대를 다 보낸 거 같다. 아이가 셋이지만 다들 성품이 온순해서 몸은 힘들었지만 큰 마음고생 없이 육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마흔의 나이에 늦둥이가 들어선 것이다. 첫 번째로 남편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제 간신히 내 시간을 갖는 여유를 되찾았건만 다시 육아를 시작하려니 자신이 없었다. 아기띠 및 육아용품도 주변에 다 나눠줬는데 도로 찾아와야 할 판이었다. 시어머님이 병원에 가서 현금주면 기록 없이 뗄 수 있다며 조용히 권하셨다. 아이 셋만 해도 생활비에 학원비까지 남편외벌이로 만만치 않은 터였기에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친정 부모님 두 분 다 폐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소천하신지 불과 오래 되지 않아 찾아온 임신소식은 내게 기쁨이기보단 근심이고 수없는 갈등이 되어 뱃속에 아이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병원에서도 아이 심장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들으면 마음이 약해질까봐...이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계산하면 엄두를 낼 수 없었지만 지우고 나서 내 마음이 편안할 자신도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남편이 결정을 내려줬다. 찾아온 생명을 우리가 선택할 권리가 없으니 받아들이자고...그렇게 나는 불혹의 나이에 다시 육아를 시작했다. 요즘은 결혼연령이 늦어져 마흔 넘는 출산율이 높지만 그 때만 해도 노산이라 각종 기형아검사로 추가비용이 많이 발생했었다. 첫째 아이 때부터 몸조리를 다 해 주신 친정엄마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리고 태교보다는 푸념하고 울었던 기억이 많다. 주변에서 축하한다고 육아용품을 챙겨주고 응원과 격려를 듬뿍 받기도 했다. 비록 내 작은 자유와 모처럼 되찾은 여유를 다 반납해야만 했지만. 뒤늦게 동생이 생긴 사실을 안 아이들은 모두 기뻐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첫째 딸과는 띠동갑이라 태어나면 자기가 업어 키울테니 엄마는 편안하게 몸조리 하시라며 위로를 건네고 서로서로 젖병 물리겠다고 다투다보니 자연스럽게 넷째 육아는 분업화가 되었다. 나이가 많아 제왕절개를 원했지만 의사선생님의 극구 반대로 결국 넷 다 자연분만으로 저렴하게 출산할 수 있었다. 넷째 왕자는 전무후무한 상남자로 우리집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누나와 형의 엄청난 사랑과 관심 속에서 다소 버릇없이 자라 혼내기도 많이 했는데 금 새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축구에 흠뻑 빠져 지낸다. 2017년에는 대전광역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출산장려시책에 기여한 공로로 시장님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다는 생각에 뜻을 같이 한 엄마들이 모여 공동육아커뮤니티를 만들어 부모소통교육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영리민간단체 활동을 하면서 육아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주위에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다문화엄마들과 모임을 형성해 알림장이나 아이들 숙제도 함께 봐주며 엄마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시끌버끌 북적북적 늘 시끄럽고 바람 잘 날 없지만 나는 감히 말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아이 한명을 낳고 교육시키는데 몇 억이 든다고 아예 출산을 포기하고 금쪽이 같은 아이가 태어나서 감당 못할바엔 강아지나 기르면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당장의 편안함이고 당장의 여유있는 삶일지 모르지만 부모의 희생과 사랑과 눈물이 거름이 되면 그 따뜻한 심장을 가진 젊은이들이 결국 이 사회를 건강하고 밝게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기에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고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3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내 사랑을 듬뿍 머금은 자녀들을 볼 때면 마음 한 켠이 뿌듯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함에 있어 큰 힘이 된다. 대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아직 갈 길이 멀기에 뛰어야 할 일들이 많지만 뛰어야 하는 이유도 다시 뛸 수 있는 힘도 결국 사랑하는 가족이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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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아파하고 성장하고 방황했습니다.
종이점빵
1년전
처음엔 덤덤한마음과 설렘,기대로 임신을 하고 양수가 터져 36주에 일찍 출산을 했습니다~~저녁 9시에 자연분만으로 출산직후 안아보고 바로 저는 회복실에 아들은 신생아실에 갔습니다. 아들은 정말 건강하고 처음 태어났을때 목청이 터져라고 울어댔습니다.그런데 다음날아침 면회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소아과에서 연락이 와 남편이 내려가 보니 아들 호흡에 문제가 있어 큰병원으로 보내야할것 같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청천벽력 같았는지요~~저희 아들은 36주 미숙아로 태어났지만 3kg으로 몸무게는 정상범위였습니다. 저는 아들 얼굴도 보지못하고 응급차에 실려 남편이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켰습니다.저는 바로 산후조리원으로 옮기고 산후조리복으로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심장의 판막이 다 닫히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거더라구요~~막달을 다 채우고 나왔다면 이런일이 안일어났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모유가 너무 많이 나오는거예요~~모유유축기로 매일 유축해서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아이가 입원해있는 중환자실은 하루에 한번 면회가 가능했습니다. 매일 면회시간에 택시를 타고가서 모유를 전해주고 왔습니다. 아이는 없는데 모유는 너무 많이 나오고 자꾸 몸에 땀이 나고 자고 일어나면 모유가 나와서 옷과 이불이 다 젖어있었습니다. 황달이 있어 황달 치료까지하고 일주일뒤에 퇴원해서  산후조리원으로 데리고왔는데 신생아실에 모유수유때 말고는 접촉도 안되고 보고싶으면 신생아실 유리넘어로만 볼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산후조리원을 퇴실하고 친정으로 바로 가서 육아와 산후조리를 같이 했습니다. 낮에는 다들 일하러 나가셔서 저혼자 육아를 하는데 그때부터 이제 제시간은 없는거죠~~~그래서 전 아이잘때 같이 자고 일어나면 같이 일어났습니다. 염치없지만 친정집안일은 안했죠~~다행히 아이가 배고플때 말고는 칭얼대지도 않고 잠도 잘잤습니다. 그래도 제생활의 80~90%는 아이에게 집중되더군요~~~점점 아이가 기고 걸어다니면서 이제는 정말 한시도 눈을 뗄수 없는 시기가 왔습니다.  정말 제하루의 97%가 이제 아이에게 할애하고 있는거죠~~정말 육아가 이렇게 힘들고 아이가 있는건 행복하지만 육아에 있어서 저라는 사람이 없는거에 좌절감이 컸던것 같아요~~누구나 겪는 부모님들의 마음아닌지 싶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도 여러번 하고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고생이라고 둘다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훈육하고 가르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게 맞는걸까? 정답은 없지만 저의 육아나 훈육방식이 다른아이의 성향과 맞을 수 있고 다른 부모님의 육아나 훈육방식이 제 아들과 맞을수 있으니까요~~~책도 많이 보고 어떻게 하는것이 최선인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부부도 마찬가지지만 자식과 부모도 서로 맟춰져 가더군요~~~저는 항상 아들을 내소속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할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뭘하나 하더라도 제가 시키면 되지만 항상 물어보고 의견을 존중할려고 했습니다.그런데 일각에선 너무 강압적이지 않게 규제하지 않는 경향으로 보시기도하더라구요~~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않았습니다. 피해야하고 위험한건 항상 경각심을 가질수 있게 가르치고 있구요~그리고 항상 판단과 결정은 스스로 하는거라고 가르치며 저는 선택에 도움을 살짝 언질뿐이죠~~~그리고 아들이 저한테 항상 말 끝나기전에 끊고 얘기한다는 말을 많이 해서 지금은 많이 고치고 아들도 인정하고있습니다. 어렸을땐 개구장이 였었어요.항상 사진을 찍을땐  이상한 표정을 하구요~~이 사진들은 양호한거랍니다. 이때 정말 이쁘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은 빛의 속도로 지나가더군요~~그때는 정말 소중함을 모르고 시간만 빨리 흐르길 원했는데 이제는 아이가 크고 말수가 적어지고~~점점 제손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습니다그리고 항상 뭔가 스스로 하고싶어할때는 꼭 시켰어요~~유지원때였는데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해서 저는 지켜보고 혼자 머리까지 감고 곧 잘 씻더라구요.마지막은 제가 거품이 있나 확인하고 샤워기로 마지막 마무리는 해줬습니다.점점 할수록 실력도 늘구요. 혼자 계속 씻는데 화장실에서 볼일보는건 괜찮은데 샤워할때는 혼자 있는걸 무서워 하더라구요.화장실 앞에 지키고 있는걸 몇년째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혼자 들어가서 잘씼습니다. 무섭다고했을때 제가 아무 말도 없이 지켜봐줬던건 제가 어렸을때 무서움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마음을 알기에 아이가 괜찮아 질때까지 지켜봐주었습니다.초등학교 3학년때 쯤엔 혼자서 라면을 끓이고 싶다고 하는거예요. 그때는 가스렌지였는데요. 제가 옆에 지켜보고 혼자 라면을 끓였습니다.지금은 인덕션으로 교체했지만요. 지금은 혼자 라면도 잘 끓여먹고, 계란후라이에 한번은 김치볶음밥도 했더라구요.남편과 제가 저녁에 부재중이라 저녁을 걱정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하더군요.집에가니 삼격살을 너무 잘구웠길래 제가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올렸네요내년이면 중학교에 가요~~더욱 더 제 아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하나의 인격체,인간으로 완성해 가겠죠~~너무 건강하게 몸과 마음이 잘자라면서 저도 같이 부모로서 한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들과 남편한테 제가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때도 있구요~~처음부터 제아들은 저희부부와 별개의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겁니다~~가족이란 소속감은 있지만 서열이 있지않은 누구나 의견을 제시할수있고 수용할수 있는 가정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백프로 완벽하진않지만 나쁜행동이 아닌이상은 규제하지 않고있으며 항상 고정관념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개방적인 질문에 개방적인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날은 자위가 뭔지 물어보길래 자세히 알려주며 부끄러운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당연한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볼수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것도 중요한것같습니다~~~저희 가족이 점점 더 성장 할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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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아이도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다
라오니엄
1년전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졌고,아이를 보고도 귀엽다 이쁘다 이런감정이 없었다또한 내가 누리는 생활을 포기하기 싫었다이런 내가 엄마가 되면 아이가 불쌍할것같아서그래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었다주변에선 '자기자식은 달라'  '애가 주는 행복이있어'이런 말에 늘 '나는 아니야' 라며 귀를 닫았었다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서른 중반이 되었다.평탄치 못한 생활과 너무 외롭게 자란탓인지옆에서 보기에 조금은 본인에게 불합리한 가족관계에도 가족이라는 단어하나에 끌려다니는 남편이 못내 바보같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던 어느날우리아이가 있다면 진정 가족이란걸 알수있지 않을까,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너무 그리워하는 남편에게그걸 만들어 주고싶다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오랜 상의끝에 아이를 갖자 결론을 내린 그날내나이 서른 중반 임신을 했다.얼떨떨. 아무 감정없이 내 뱃속에 잘붙어있을까?하는의구심만으로 18주가 지났고19주쯤 태동같은데 아닌것같은게 느껴질쯤..내가 마음가짐이 변했다 내 아이구나. 내가 엄마구나. 가슴한편 몽글몽글 한 그 느낌..이벤트없이 자라다가 조기진통으로인해 준비 없이 만나게된 나의 아들 ..출장이 잦은 남편 (한달에 삼사일 귀가) 덕분에출산 2주만에 혹독한 독박육아가시작되었다하루 한시간 자면서 배앓이 심한 아이 울음 달래가며,절대 바닥에 등대지않던 아이 24시간을 안아서 입히고 재우고 먹이고 나도 울고 너도 울고  단 10분도 떨어져본적 없이 껌딱지 였던 하루 하루 가 지나고 계속 지나 7개월이 지나고보니 없던 모성애는 무조건이고, 동지애 전우애 등등모든 애 란 애는 다 생기게 되네!! 아이에게 화 한번 내지않고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초기(?) 육아에 스스로 대견해하고있던어느날 본인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시작한 9개월부터 나는육아불맛을 보았다 다들 어떻게 이럴때 웃으면서 얘기할수있지?다들 어떻게 대처하지? 다들 나만큼은 힘들다 생각하는 육아겠지?아 이래서 산후우울증이 오는거구나..하루 수백번 수천번 참을 인을 새기고 새기다욱! 하고 화를 버럭 내버리고나면 후회하고화내고 울고있는 아이를 보니 나도 울고.. 참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갔다그리고 그 하루는 아직도 계속되고있다너무 너무 힘든 나날이지만 하루하루 천천히 가길 바랬다. 내아이의 지금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담고싶어서...그렇게 나는 엄마로써 성장 했던것 같다다른 아이보다 조금 느린게 잘못된 육아를 하고있는것같고,밥을 먹지않는 요즘 자기 주도식을 하지않아 그러나이유식을 바뀌야되나 고민하게 만들고,성질부리면서 물건을 던질때마다 엄하게 혼내면서도엄하게 해서 더 삐뚤어지는건가 싶고,말문이 트이지않는걸 보면서 내잘못인것만 같고,조금만 다쳐도 그걸 방지하지못한 내탓에 후회가득이고,피부트러블 하나에 피부 박사 저리가라 공부하고있는 나를 보며아이가 싫어 , 나를 포기하기 싫어 아이 갖지 않겠다던나는 없어진지 오래.이렇게 나도 모르는새 아이와 같이 엄마로 크고 있었구나 싶다아직 육아 불맛은 진행중이지만 처음 보단 수월하게 아이를 대하고 케어하고 같이 울고불고 하던 날들이 웃으면서 지나갈수있게 된만큼 스스로 아이와 같이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를 다독여본다내아이가 천천히 자라듯 나도 천천히 자라고 있는거겠지?아이울음소리는 여전히 예민하게 들려서 너무 싫고 ..다른 아이를 보고도 여전히 귀엽다 이쁘다 느껴지지 않지만.다만 내아이가 주는 행복은 알것같다내가 조금더 어릴때 너를 만났다면 좋았을걸 후회가 될만큼 내아이가 주는 행복을 오래오래 느끼고싶다..두명 세명 키우는 엄마, 워킹맘을 존경의 눈빛으로바라보게 만드는 아들과 많이 부족한 엄마의 하루는 오늘도 지나가고 있으니 내일은 조금더 성장한모자로 하루를 맞이 하겠지요?ㅡㅡㅡㅡㅡㅡ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엄마가된 저도 조금씩 천천히 성장중입니다.하물며 이글을 읽는 엄마님은 얼마나 대단하게 성장중이시겠어요!!제가 아이를 키우며 자주 들던 생각이"난 엄마로 부족한 사람인건가" 였습니다앞서 말했듯 아이울음소리에 예민하다보니제아이의 찡찡거림에 의연하게 대처하는게너무 어려웠어요아이 교육에는 분명 늘 같은 패턴이여야 된다는데저는 아이 우는 대목에서 어쩔땐 웃으며 넘어가고어쩔땐 단 1초도 못참겠고..생각과 다짐은 아이의 찡찡거림에 늘 웃으며 다독여주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않아 밤에 하는 후회 목록 1위 였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구요최대한 노력중이지만 울음소리에 버럭하고 나면드는 생각이 저거였죠.."난 엄마로 부족한 사람인건가"하는 자책감..주변 물어보고 기대고 할곳없는 저에겐 특히나 독같은 생각이였죠자존감을 떨어트리기에  딱좋은 생각일주일 정도 정말 심한 우울함과 자존감바닥을 맛보다가 저만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그럴때마다 저는 아이를 바라보고미안해 사랑해~하고 아이를 마구 만지고 안아주고 해요미안함을 털어버리려는 수작이지요 하하하..그래도 그런 수작으로 아이에겐 미안함을 표현하고만지고 안아주는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스스로 다짐하게 되더라구요혹시 이글을 읽는 엄마중에 저 같이 자책감이 드시는분이 계신다면지금 당장 아이를 바라보고미안해~ 사랑해~ 말하고 안아주세요아이를 안는 순간 내가 위로 받게됩니다이렇게 아이와 내가 배우면서 커가는거라 생각합니다처음 부터 완벽한 엄마였음 좋았겠지만내가 완벽한엄마가 아니니 계속 노력해야겠지요저. 계속 계속 노력해서 완벽한 엄마가 되볼께요세상 모든 엄마들 힘냅시다저도 힘내겠습니다! ☆ 진심으로 다자녀어머님, 워킹맘님 존경합니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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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꽃다운나이에 찾아온 연년생아들콤보
엄*미
1년전
연녕생 두아들과 20대의 엄마의 만남 성장기저는 10년전 큰아이가 두살 18개월일때 둘째아이를 낳았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열한살,열살이고요. 아이들 어렸을때를 추억하며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은 저의 육아기를 나누려 합니다. 둘째를 임신했을때 배가 불러오지만 큰아이를 배에 척 걸쳐 안고 다닐수 밖에 없었지요.첫째를 낳고 몸은 20대라 그런지 회복이 빨랐지만 마음엔 병이 들어 있었는데 채 아물기도 전에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였습니다. 둘째를 낳고는 내가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정말 정신이 없는 하루 하루 였지요. 어떤 무더운 여름날 밤새 고열이 나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소아과에 갔던날, 대기는 길어지고 두시간여를 아파서 보채는 두아이들을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래며 기다리다가 한숨푹쉬는데 눈물이 저절로 나더라고요. 남편은 출근해서 일을 하고 혼자서 요령도 없고 주변에 친구들도 한창 예쁠때 일할때라 아이들을 키우는 삶을 본적도 없고 그저 전투육아라는 책만 파며 원래 이렇게 힘든거다 스스로 위로하며 그 시간들을 보냈지요. 어느날, 큰아이가 3살때였을까요, 아이 친구와 엄마가 집에 놀러왔는데 잠깐 주방에서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베란다에 나가 동화책을 베란다 창틀 너머로 쏙쏙 넣어 창밖으로 아이들이 떨어트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구멍에 넣는 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말 그때도 경비아저씨가 우리집을 찾아오셔서 호통치셨을때 너무 죄송하고 지나던 사람이 맞았으면 아찔했을 그 사건에 너무 놀라 펑펑 울었지요. 모든것이 엄마인 제 잘못이니까요. 세살, 네살 그 다음해는 네살, 다섯살 그다음해는 다섯살 여섯살 그렇게 아이들은 성장했고 저는 일찍부터 큰아이 돌때부터 어린이집을 보내며 잠시라도 제 시간을 보내고 자격증공부도 하고 또래아이키우는 엄마들과도 만날수 있었어요.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게 된 이유는 둘째 출산으로 첫째를 같이 보살펴주기에 여유가 없었기때문이에요~그리고 친정식구도 시댁식구도 의지할수 없었던 저는 어린이집을 친정집처럼 의지하게된것이지요. 4세까진 영아전담 가정어린이집을 보냈고 큰아이 5세부터 공공형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는데 넓은잔디마당이있고 어린이집뒤로는 산이 있는 환경이 아파트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겐 마음껏 뛰어놀고 산에도 가고 건강하게 자라기에 좋은 곳이였어요. 원장님 교육철학도 아이중심교육으로 먹거리도 신경을 많이 쓰셨고 텃밭에서 아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먹어보는 체험활동에도 무척 신경을 쓰셨어요. 그 마음이 닿아서 육아로 궁금한점이 생기면 상담도 하고 소통하면서 두아이 모두 졸업까지 하게되었고 지금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중인데도 원장님과 안부를 묻는 사이로 지내고 있답니다. 또래엄마들과는 첫째 아이 세살때부터 공동육아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네명이서 돌아가면서 간단한 오감발달 수업을 준비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국수관련 동화책을 동화구연으로 읽어주고 국수를 풀어놓고 부셔도 보고 먹어도 보고 뿌려도 보는 수업, 신문지를 찢고 구기고 동글게 말고 던져보는 수업, 줄에 관련된 동화책 읽고 줄에 과자를 메달아 과자따먹기 수업등 시간을 맞춰 모이고 도시락 간단히 준비해서 소풍도 가고 곤충도 보러 다니고 열심히 무언가를 했었네요.큰아이 세살쯤 시에서 운영하는 공원 물놀이장에 갔다가 첫째가 물에 빠졌을때도 저는 둘째아이를 안고 있어서 들어가 꺼내주지도 못했는데 또래 엄마가 아이를 건져내주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날은 만나는 엄마들중 성숙한 언니에게 전화해 펑펑울면서 너무 힘들다 한참을 운적도 있네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나는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것, 말하지 않아도 너의 맘이 내맘, 그냥 그렇게 같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안고 하루 하루를 보낸다는것만으로도 의지가 많이 되었지요.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상대로 육아종합지원센터나 어린이집에서 부모교육도 많이 해주고 있어요. 마음챙김교육도 있고 만들기교육이나 역량강화교육도 있고 육아방법코칭 교육도 있고, 찾아보면 도움이 되는 교육이 많이 있어요. 억지로라도 나가 교육을 받다 보면 집에서 아이들과 있을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것도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천천히 시작해보라고 초보 엄마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하루 하루 반복되는 삶에 아이들은 예쁘지만 내 삶은 제자리걸음같고 숨이 막힐때도 있는데 우울감이 찾아올때는 저는 몸을 씻었어요.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세수도못하고 양치도 못하고 샤워도 못하고, 할시간이 없어서 꿉꿉함을 안고 아이들을 보고 그러다 보면 아이들에게도 감정이 격해지게 되요. 꼭 시간을 내서 나를 만져주고 씻어주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다른일들 다 제쳐두고 같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도 열심히 만나고요. 그럼 다른일들도 더 열심히 할수 있는 힘이 생긴답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부모탓이다라는것이 결론내려지는 세상이에요. 그런 말과 시선에서도 자유하시고 억지로라도 내 이름을 내가 불러주며 누구야, 사랑해,잘하고 있어 하며 내마음을 토닥토닥하며 하루를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앞으로도 그렇게 나를 다독여주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려고요. 이세상 모든 엄마는 위대합니다. 사랑합니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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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우리가족 성장통이야기!
최*영
1년전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첫번째 인연 아진이와 우당탕탕 엄마아빠의 성장통이야기!5년 연애끝에 먼저 우리에게 찾아와준 (?) 아진이 ♡결혼식을 시작으로 세식구가 함께하게 되었다.8년을 다닌 회사에 임밍아웃을 하고 막달인 8월 중순까지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40주 0일차가 되던 날 병원 가는 길에 차 사고가 났다.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차 되어있던 내 차를 갑자기 뒤에서 들이받았다. 다행히 아이는 아무 이상 없었지만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물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딸은 40주 4일이 되어도 나올 소식이 없었다. 주수가 지날수록 자연 분만이 어렵다는 소리에 유도 분만을 진행하게 되었다.아직도 신랑과 웃으며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병원 들어가기 직전, 편의점에 들어가 불닭 볶음면을 야무지게 먹었던 이야기이다. 앞으로 미역국만 먹어야 된다며 만삭의 몸으로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ㅎㅎ 그렇게 분만 전날에 입원하여 다음날 새벽부터 유도 분만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우리 딸은 엄마를 닮아 쫄보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촉진제가 몸에 들어가자마자 심장박동수가 떨어졌다. 그렇게 진통은 느껴보지도 못하고 응급제왕을 하게 되었다. 간단한 주사 바늘에도 깜짝 깜짝 놀라며 두려움 가득하게 수술실에 들어갔다.오후 3시 40분. 드디어 우리 아진이가 세상으로 나왔다.남편은 수술실 밖에 대기중이었는데 아이 울음 소리가 처음 들릴때 여러가지 감정이 오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마취에 잠든 나를 간호사 선생님이 깨워주셨는데 진짜 너무 취해버려서인지 (아딸딸☆) 사실 아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마취가 조금씩 깨는데 하반신 마취가 풀리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발바닥에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처치가 끝나고 방에 들어와 회복하고 나니 그제서야 아기가 생각나기 시작했다.그렇게 시작된 육아의 세계.이 작은 아기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어떻게 재워야 하는지, 모자동실로 2시간만 혼자보는데도 울면 어떡하지 걱정이 가득했다. 조리원에서의 수유지옥(^^) 을 통해'젖하나 물리지 못하는데 집에서 혼자 아이를 어떻게 보지'하며 눈물도 흘렸다.조리원에서의 생활이 갑갑해서 일찍 퇴소 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나는 다행히 조리원 생활이 잘 맞았다.코로나 이후로 조리원 동기라는 의미도 사라져서 밥도 따로 먹어야 하긴 했지만 수유 외에는 내 시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고  마사지, 찜질, 족욕 등 쉼이 있어 좋았다. 조리원에서 수유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설소대 수술을 권하셨다. 지금은 간단한 시술이긴 한데 그래도 아프진 않을까 걱정했다. 2주 후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찾아왔다. 수유 시간, 낮잠 시간, 밤잠 시간, 기저귀 교체 등등의 체크는 기본이유식 초중후기 유아식.. 정말 쉬운게 하나도 없는 새로운 세계였다. 밥은 또 얼마나 안먹는지 잘먹어도 걱정 안먹어도 걱정이라던데 정말이었다. 영유아검진으로 백분위 순위매기는 등수에는 얼마나 또 집착하게 되는지 모른다.키는 컸으면 좋겠고, 머리는 작았으면 좋겠고, 몸무게는 적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검사표를 보며 들었다.새벽수유는 아직도 걱정이다.밥을 잘 먹지 않는 아기이기도 하고, 기질이 소리에 예민한 아이라 자주 깬다. 14개월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벽에 젖을 찾는다.우식증이 걱정되어 새벽수유를 끊으려 노력하고 있는데정말 쉽지 않다. 뭐든지 초장에 잡아야 하는것 같다.둘째는 꼭 성공하리!!아이는 열나는 것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우리 아기는 지금까지 총 3번 병원에 입원하였다. 전부 감기 바이러스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한 번은 간호사 선생님이 바늘을 잘 못 꼽으시는 것이다.. 고사리 같은 손에 바늘을 세번이나 다시 꼽을때 나도 덩달아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모른다. 아이가 아파서 우니 속상했다.나는 어릴때부터 아토피가 있어 아기가 태어나기전부터 피부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태어난지 2주 후, 얼굴에 붉은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나 상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깨끗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알레르기 검사를 통해 우리 아이가 계란흰자와 우유 알러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돌 즈음 지나서는 많이 호전되고 있어 감사하다.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서툴고 부족하고 걱정투성이지만아진이는 우리가 미안해하는 마음도,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다 알고 어느덧 뽀뽀로 ,그리고 포옹으로 힘을 준다.아이도 쑥쑥 자라지만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양가부모님들에대한 감사함도 무척 든다.정말 생명을 키워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는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둘째도 계획중이다! 둘째는 더욱더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궁금하다.생명은 소중하다.생명은 기쁨이다.생명은 감사다.생명은 행복이다.이번 이벤트를 통해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되던 나날을 돌아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나의 친정 엄마가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는 작가가 꿈이었다고 한다. 시 읽는 것이 취미이시고 글쓰기를 좋아하셨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내 것을 잠깐 내려놓는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더 가치 있고 귀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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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2막 나의 발견
June
1년전
[1. 나의 발견]“안녕하세요. 시민아이디어 구현 운영사무국입니다.OOO시민작가님의 사전 인터뷰 질문지 송부드립니다. 질문지 확인하시고 인터뷰는 촬영팀과 조율해 연락드리겠습니다.”아이 둘 키우는 평범한 내가 인터뷰라니! 촬영이라니! 대박!!! 상금도 이백만원이란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2021년 그러니까 첫째가 8살, 둘째가 7살 되던 해에 서울시에서 주최로 한 ‘공공미술 시민아이디어 구현’ 공모전에 7년간 썼던 육아일기를 추려서 낸 적이 있다. 2014년 첫째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던 태교 일기가 육아로 지치고 힘든 마음을 어디가 하소연 할 데가 없어 자연스레 육아일기로 이어졌고, 본의 아니게 2015년 15개월 차이로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기 시작하면서 육아가 힘들면 힘들수록 육아일기를 쓰는 횟수도 많아졌더랬다. 육아는 같이 한다지만 종일 남편도 회사에서 듣기 싫은 이야기 내내 들었을 텐데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나라도 하나에서 열까지 듣기 싫겠다. 아이들이 어릴 땐 그래도 저녁밥을 먹이고 목욕만 시키면 8시 반이나 9시면 잠드니 그때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면 졸리고 피곤해도 매일매일 찍은 아이들 사진이며 그날의 나의 생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블로그 글로 적어 내곤 했다. 물론 육아는 잠과의 싸움이건만 잠보다 글쓰고 사진을 올리고 올린 글을 다시 읽어 나가면 육아 스트레스가 이상하게 해소 되는 기분이랄까. [2. 나란 사람]12년 전 내 나이 36살이던 해의 12월 (한달 넘기면 37살이 될 뻔) 에 난 결혼을 했다. 당시 나는 친구들에 비해 결혼히 상당히 늦은 편이였고 아이는 낳으려 생각했지만 잘 가져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하게 첫째가 생겨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온전히 육아 본선에 뛰어 든 건 38살 여름.나 밖에 모르는 일명 ‘현이 바보’ 남편도 있겠다(누구나 신혼땐 그랬겠지만)  ‘육아 까짓거 별거 있겠어. 난 여전히 꽃길만 걸을 거야.’ 라고 육아에도 자신만만했던 나이다.(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교만했던지. 아마 그 생각 때문에 육아가 더더욱 녹록지 않았던 거일수도)하아....육아.. 왜 누구도 이렇게 힘들다고,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안 된다고 이야기 해주지 않았을까. 육아를 하면서 너무도 큰 배신감에 매일 매일이 서글펐고, 육아 힘들다는 동네맘들을 만나도 나처럼 힘든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다들 힘들대. 아이 하나 키우는데 힘들다고, 또 들어보면 친정이나 시댁이 옆동네여서 맡기고 한숨도 돌리면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만, 나의 육아가 힘드니 누구 탓을 찾기 바빴다.늦게 결혼한 내 탓, 친정과 시댁이 지방인 탓, 친정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아프시고, 시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시어머님은 일 하시고 ,왜 나만 도와줄 사람이 없이 혼자인거야. 외로웠다.첫째 6개월때 둘째가 바로 들어섰고, 첫째 돌 때 이미 배가 불러서 볼록 나온 배 위에 징징대는 첫째를 아기띠로 안고 다녔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이유 없이 아픈지. 장롱면허였던 그땐 아이 둘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병원을 다녔다. 연년생을 혼자 악착같이 키우다 보니 산부인과 쪽 염증과 장염과 감기는 한 세트가 되어 한 달에 한번씩은 꼭 거쳐가고, 내가 아파서 링거맞으러 병원을 가려해도 아이 둘을 데리고 다녀야 하니 세상에서 난 가장 불쌍한 여자였다. 근데 이상하게 이렇게 힘들어도 ,아파도 ,이런 나의 모든 감정들을 글로 표현 할 때 만큼은 너무 행복했다. 육아 스트레스를 풀 데가 있어야 한다던데 나의 그 스트레스 돌파구는 글이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해 두해 쓴 나의 일기와 사진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 ‘2021 공공미술 시민 아이디어 구현‘ 공모전의 시민 스토리에 당선이 되었고 우리 아이들의 육아일기를 바탕으로 한 건축물도 설치되었다. 누구 누구 엄마 , 누구 누구 어머니가 아닌 ’OOO‘이라는 내 이름으로 시민작가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내 인생이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였다. 서울시청누리집에 실릴 인터뷰도 했다. 가문의 영광이였다. [3. 인생 제2막]6년간 경단녀로 육아에만매달렸던 나는 지금 전시관 안내데스크 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이를 낳기 전 일본어 통역하는 일을 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삶을 걷고 있는 것이다. 전시관 주 이용객이 어린이와 학생들인데 여기 업무를 맡게 된 것도 치열한 육아 전선에서 얻어진 고급지고 알찬 현장 경험과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면서 얻어진 나의 짜투리 시간을 도서관에서 종류 가리지 않고 봤던 독서와 그리고 육아 일기 쓰면서 꾸준히 말하고 쓰는 능력을 키워왔던 덕분이라고 감히 말 하고 싶다.과거 나의 초등학교 시절 특별활동 시간에 특출나게 잘하는 게 없어서 가장 인기 없는 운문부에 들어갔던 게 생각이 난다. 시를 적어 내래서 그적이니 자꾸 상을 주셨다. 그래. 그랬었다. 글쓰는 재주가 있었는지 육아일기를 쓰면서 잊었던 어릴적 나의 재능이 생각났다.육아 서적을 읽으면 펑펑 울면서 아이들에게 이러지 말아야지 새삼 마음 다 잡고 반성 하다가도 책을 덮으면 1초도 안되어 난 다시 계모 엄마로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을 통해 느끼는 행복이 육아의 힘듬보다 커서 그래서 육아를 한다고들 한다. 근데 정말 힘든데 이 딴 말들이 귀에나 들어올까?육아는 참을 ’인‘자를 수 천번 쓰면서 나도 몰랐던 지킬앤하이드 같은 내가 드러나고, 남편에게 보이기 창피할 정도로 형편없는 나란 사람의 바닥까지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내 탓을 하게 되면 우울증이 되어 돌아오지만 여기서도 장점은 있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일단 내려가 봤으니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었다. 다시 올라오면서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꿈틀거리는 재능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런 재능을 나의 경우는 머리가 나빠서 글로 그적여야 보였다. 공모전 하나에 당선되었다고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지 않았지만 사회와 단절되었던 육아로 무너진 나의 자신감과 자존감에 불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뒤로 글쓰고 사진 찍는 공모전과 이벤트가 있으면 종종 참여해서 어떤 날은 꽃다발이 당첨이 되어 오고 맥주 한 박스가 배달되어 오고 또 어떤 날은 쇼핑몰 포인트가 지급되는 소소한 삶의 재미를 맛보고 있다. 누구누구 엄마가 되어 비로소 발견한 나의 재능으로 보상받는 이 짜릿한 기분. 현재의 육아가 너무 힘들지라도 지금의 이 시간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내 인생의 문이 완전히 닫히는 느낌이였는데. 육아 스트레스때문에 썼던 글들이 쌓이고 쌓이니 또 다른 문이 조금씩 열리더라. 이게 이제부터 펼쳐질 내 인생 제2막의 시작인지도.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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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
micco
1년전
결혼을 하고 "엄마" 라는 말을 듣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든것이 처음이라 서툴렀던 첫째육아, 꽤나 민첩해진 둘째육아를 거치며 4명의 '완성형'가족이 되었습니다.  사실 아이를 낳기 전 저는, 모난 돌같은 사람이었어요. 근거없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파워당당하고, 예민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 행성에서 떨어졌는지도 모를 '아기인간'을 품에 안고서는 세상이 확 달라보이더라고요. 유모차를 끌고 대중교통 타보신 분들이라면 아실겁니다. 휠체어를 타고다니는 장애인들의 불편함을요... 아픈아기데리고 대학병원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아실겁니다. 희귀질환으로 장기입원하거나 평생 난치병을 안고살아야 하는 아이와 부모의 심정을요...그 외에도 아이와 함께 다니며 타인에 대한 생각을 할수 있는 계기가 많아졌습니다. 또한 생각지 못한 배려에 따뜻함을 느끼는 날도 많았어요. 이를테면 식당에서 아이가 음식투정으로 못먹고 있을때 옆테이블에서 건네주신 김한봉지가 그렇게 감사할수가요. 학교나 직장에서 배우지 못했던 마음수업의 연속이었습니다. 감수성은 또 얼마나 풍부해졌는지 '세 발 강아지 뽀삐' 라는 책은 읽어주다가 같이 울어버렸어요. 출산 전에 희노애락의 주기가 일단위 였다면 지금은 시간단위, 분단위가 아닐까 합니다. 방금 슬픈이야기를 읽으며 울었는데 점프해서 등에 매달리는 아이를 야단치며 화를냈다가, 잠시뒤의 애교에 사르르 녹고, 웃으며 놀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면 저의 mbti 따위는 온데간데 없고 엄마라는 타이틀 만이 남을 뿐입니다. 또한 감정적인것 이외에도 내아이맞춤 의사, 요리사, 기술자, 선생님, 판관 포청천의 역할까지 멀티플레이어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게 민첩한 사람이었나, 내가 아닌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제가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저도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성장하고 있으니 아이나이와 내 나이를 합친것이 연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아이에게 물질적인것이나 감정적인 부분을 해결해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을 정립시켜주는 일이에요. 본인의 생각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부모가 '맞다, 아니다'를 판별하여 결정하고 아이를 사회구성원으로 맞춰넣는일을 하게되는데 누군가의 인생이 나에의해 결정된다는것은 여간 부담스러운일이 아니더라고요. 육아서적이나 TV,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어도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더러 딱 맞게 적용될리가 없죠. 그럴때 저와 다른 성향인 남편의 의견이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아이를 크게 야단치고 있으면 남편이 나지막하게 타이르고, 교육에 대한 의견도 다르며, 감정적인 부분도 다릅니다. 누군가는 부부싸움이 되지않냐 물으시지만 저희 부부는 "당신이 나와 똑같지 않아 다행" 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서로 다른 의견을 들으며 아이가 다방면으로 생각할수 있는 기회를 얻을수 있을것같거든요. 육아 초창기때는 의견충돌로 이어지던 부분들이 이제는 조율이나 수용이 가능하다는것이 우리부부가 아이들을 통해서 또한뼘 성장했음을 알려주는 방증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내아이가 특이해보일때가 많습니다. 저처럼 예민한 아이를 키우신다면 더더욱요..고쳐야할 습관을 오래도록 고수하는것, 버려야할 물품을 버리지못하고 모아두는것, 오감을 자극하는것 많은것들에 대한 두려움, 대체 왜때문인지 모를 짜증과 울음, 엄마로써 한숨이 푹푹 쉬어지는 순간들입니다.대체 이아이가 기관에서 잘 적응할수 있을까? 잘하고있나? 수많은 물음표가 들지만! 네, 잘 적응하고있더라고요. 어느날 아이가 밤하늘을 보다가 "엄마 저 별들은 모두 조금씩은 다르지?"하고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별것아닌 질문에 저는 머리를 쾅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모든 아이들은 별과같구나.작건, 크건, 형태가 어떻던 ,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나를 부모로 만들어주었지. 세상에 똑같은건 하나도 없는거지. 하면서 미안함이 몰려오더라고요.그날이후부터는 아이를 특별하게 바라보게되었습니다.전에는 반드시 고쳐야할 습관으로 보였던것이 , 나중에 아이의 강점이 될수도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저희아이는 손을 가만히있지않고 뭘 엄청 만지고 실수해서 주의를 주는편인데 나중엔 사진만봐도 촉감을 알수있는사람이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가 어렸을때 추운 겨울이면 호빵과 귤을 사와 가족이 이불에 둘러앉아 먹던 기억이 납니다. 밖에서 엄마아빠의 목도리와 옷으로 중무장됐던 기억도 나고요. 물론 돈버시느라 아둥바둥 바쁘셔서 저에게 관심을 표하지 앉으실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자식을 키우며 생각해보니 저한테 좋은기억이던, 나쁜기억이던 단 한순간도 저의 부모님은 저를 잊으셨던적이 없으셨던것 같습니다. 돈을 버는 것조차 자식을 위한 일이라는걸 지금 저희가 느끼고 있으니까요. 지금 이순간도 가장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제 남편에게 등을 맞대 기대어 말하고 싶습니다. " 쫄지마 여보! 우린 잘살고 있어! 당신 뒤에 나있다! " 매일이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 존경합니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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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보 엄마의 콩닥콩닥 성장기
빵미
1년전
결혼 전부터 임신과 출산이 무서웠던 겁많고 소심한 스몰a형 엄마가 출산이라는 큰 산을 넘어 아기와 첫 만났을 때..나의 첫 마디는 "왜 이렇게 못 생겼어요? ㅠㅠ" 였다.. 하하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외모는 아니었지만 이 작고 꼬물꼬물하는 생명을 어찌 키워나갈 지 걱정이 태산이었다.누구나 그랬겠지만 처음에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수유 & 기저귀 갈이 패턴으로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80일 정도 되었을 때 그나마 수유텀이 조금 길어지기 시작했다.어느 날 새벽에 수유를 하고 다시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기가 배고파하며 울기 시작했다.평소에는 바로 분유를 주었지만, 그날 따라 수유텀이 길어졌으니 언제쯤 먹겠다 하는 기대감이 있던 탓이었을까?금방 울기 시작하는 아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아기한테 화를 내고 말았다."너 분유 먹은지 얼마 안됐잖아!"알아들을리 없는 아기는 계속 울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아기를 보는데, 아기는 내 얼굴을 보니 반가워서 방긋방긋 웃었다.그 얼굴을 보니 정말 너무 미안했다.아기는 평소처럼 배고파져서 울었을 뿐인데, 내 기대감과 감정 때문에 아기한테 화를 내다니..엄마가 자기한테 화 낸줄도 모르고 엄마밖에 모르는 아기를 보면서 앞으로는 내 감정 때문에 아기한테 화내는 일 없도록 다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백일 쯤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백일 때 복직 예정이었기 때문에 슬슬 복직 준비도 하는데 아기 피부가 점점 까실까실 올라오더니 자꾸 긁는 것이 아닌가..신생아때 태지를 보고 문제 있는 것인가 했었는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며칠동안 로션도 듬뿍 발라주고 다른 것으로 바꿔봐도 소용 없어서 혹시 몰라 병원에 갔더니 아토피 일 것 같단다.아직 어려서 아토피 진단을 하진 않지만 아기가 간지러워서 힘들었을 거라며 연고, 항생제를 처방 받았다.말도 못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일찍 병원에 갈걸 너무 후회가 되었다.백일만에 항생제까지 먹이게 되어 너무 미안했다.아기는 천진난만하게 엄마만 보면 좋아하고 웃고 엄마는 속상한 마음뿐이었다.회사에 복직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무더운 여름을 보내며 어느덧 200일이 가까워졌다.여느날과 같이 출근하려는데 아기 몸이 평소보다 따끈따끈 한 느낌이 들었다.더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기저귀에서 평소랑 다른 냄새가 났다.약간 찜찜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며 폭풍검색을 하였는데 비슷한 증상으로 요로감염 이야기가 나왔다.요로감염일 경우 각종 피검사에 무조건 대학병원 입원하여 치료해야 한 다는 얘기에 정말 머리가 핑핑 돌았다시어머니께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하고 오후에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아기와 시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아직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사람 많은 곳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쩌다가 걸린 것인지..나와 남편은 요로감염보다 차라리 코로나가 낫다고 나름의 안심(?)을 했지만열 때문에 기운이 없이 축 쳐져 있는 아기가 너무 안쓰러웠다.직장생활은 하는 엄마아빠 때문에 시부모님과 아기의 코로나 생활이 시작 되었다아기는 열이 나긴 했지만 다행이 이틀밤만 고생하고 호전 되었고 시어머니는 아기 돌보시느라 며칠밤을 뜬눈으로 보내셨다.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셨던 시아버지는 아기와 놀아주시느라 자연스레 코로나에 걸리셨다.엄마아빠는 강제자유시간이 생겼지만 걱정되어 맘편히 잘수도 없었다.한번은 예방접종 맞으러 갔는데 피가 안멈춰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주사 맞을 때 혈관을 잘 못 건드린 것 같았다.피가 계속 나는 줄도 모르고 병원 밖까지 나갔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따라와서 피가 나는 것 같다고 해서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갔다.다행히 조금후 지혈 되었는데 집에와서 보니 옷에 피가 범벅 ㅠㅠ예방 주사를 맞고 이렇게 피가 난 적이 있었던가?정말 별일이 다 있다…아기는 백일마다 성장하는데 백일마다 고비가 와서 쫄보엄마는 마음 놓일 틈이 없었다.다행히 얼마전 지난 300일에는 큰 고비 없이 지나갔다.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기가 넘어질까 침대에서 떨어질까 뜨거운것에 데일까 걱정한다.아기가 기기 시작 했을 때, 잡고 일어났을 때. 점점 발달 해 가면서도 우리 아기가 발달 상황이 너무 늦진 않는지. 다른 아기는 이런 것도 하는데 우리아기는 왜 못 하는지 하나하나 비교 해 가면서 신경을 쓰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사람이 모두 같을 수 없듯이 아기들도 각각 모두 다르다고,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물론 한 행동을 시작하는 시기도 다르고 말이다.그런데 우리 아기가 남들보다 늦어 보이면 문제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게 된다. 난 아직도 아기가 잘 때 잘 자는지 숨소리를 확인한다.왜이렇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우리의 부모님들도 이렇게 매일매일 걱정하며 키우셨겠지어느 나라 속담에 아기를 한명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정말 혼자서는 아기를 키우지 못 했을 것 같다침대에서 떨어져 울때도, 코로나에 걸렸을때도 종종거린건 항상 나였고 오히려 아기는 의연했던 것 같다달래주면 금방 엄마 얼굴 보며 웃고, 코로나 때도 밥 잘 먹으며 점퍼루를 뛰던 녀석.병원진료나 무슨 일이 있을때도 감정 소용돌이 치는 엄마아빠보다 더 의젓한 사람이 우리 아기였다.가끔 아기에게 너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낫다고 할 때가 있다.물론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예민한 아빠와 걱정 많은 엄마보다는 제일 의젓한 것 같다.오늘도 엄마한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힘차게 의젓하게 잘 자라는 아가를 보면서 나도 마음과 감정을 잘 다스리며,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엄마로 함께 성장 해 나가야겠다.
#부모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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