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 문득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꼈다.
8월 1일부터 지금까지, 벌써 26일째다.
처음엔 느리게 가던 시간이 어느덧 너무 빠르게 가고 있다.
그린델발트로 향하는 길, 저 멀리 눈 덮인 산을 보고 “우와 우와!!!”하며 탄성을 질렀던 날도, 프랑스 디즈니랜드 파리에서 멋진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도, 벨기에의 노천 레스토랑에서 여행객들을 마주하며 체리 맥주를 먹어본 날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했던 일도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어떻게 마무리하고 오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일요일마다 동생네 부부가 다니는 한인교회에 가서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 분들과 교류를 해왔는데, 그분들과도 정들어서 마지막 주 예배 시간은 뭔가 아쉽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이도 유치부 예배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내심 아쉬웠는지 아침부터 많은 질문을 했다.
“엄마, 오늘까지만 가고 이제 여기 사람들 못 보는 거야?”
“영영 못 보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4일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볼 수 없지, 독일로 오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이의 질문에 어떤 답변을 주는 것이 현명할지 잠시간 생각하다가 대답해주었고, 그날은 예배 시간에 유독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전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에 있는 비빔밥 만찬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데, 독일에 살고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나누려는 모습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독일에서 한 집사님 댁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우리가 온다고 직접 구운 스테이크에 감자요리와 아이들을 위한 LA갈비까지 구워주셨다.
집사님은 미국 군인으로 20년간 근무하고 전역하신 후 미군 공무원으로 독일에 거주하시는데, 온 가족이 미국 내의 여러 도시에 몇 년 단위로 이사하고 일본으로 이사해서 5년간 살았다가, 한국에도 몇 년간 살다가 지금은 전역하시고 독일에 있는 미군 부대에 공무원으로 근무하신다고 한다.
정확한 연세를 여쭙지 않았지만, 부부 두 분의 연륜만큼이나 말씀 중에 느껴지는 해외 거주 경력과 적응력은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이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20년간 약 4개국 12개의 도시를 컨테이너로 짐 부치고 선박을 통해 몇 달 걸려서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짐이 안 와서 빈집으로 몇 달간 사신 적도 있다고 한다.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접해주시는 내내 반겨주셔서 더 많이 감사했다.
✈️
귀국 전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소소하게 드릴 선물을 사러 마트에 자주 갔다.
독일 마트에 파는 물건 중 한국인들이 여행하러 오면 꼭 사서 가야 후회 없다는 품목이 몇 가지 있는데, 품질 좋기로 유명한 독일의 의약품이나 Derma 화장품, 분유나 유아 간식, 육아용품들 그리고 다들 아시는 Kamil 핸드크림과 치약 종류가 속한다.
아이랑 dm을 가면 꼭 바구니 하나를 아이가 들게 하고 손에 1유로 동전을 쥐여주곤 이야기한다.
“1유로로 무얼 살 수 있을까? 담아볼까?”
한국 화폐랑 다름을 인지하고 스스로 예산에 맞는 소비를 해보는 경험이야말로 산 경험이기 때문이다.
마트에는 아이가 한국에서도 좋아했던 발포 비타민! 사탕이나 껌, 여행 시 필요로 하는 여행용 화장품 등 1유로 미만으로 살 수 있는 게 많았다.
✈️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D-day!
짐을 싸는데도 이틀이나 걸렸는데, 그 와중에 한국으로 귀국 시 24시간 이내 코로나검사 결과를 가져가야 했다. 다행히 결과는 음성!
결과지를 잘 챙기고, 나머지 짐을 싸고 퇴근한 동생과 올케언니, 조카 모두 우리를 배웅해주러 1시간 거리의 공항으로 같이 갔다.
마무리 짐 싼다고 점심을 거른 날 위해서, 공항 가는 차 안에서 먹을 수 있게 준비해준 우리 올케언니. 마지막 날까지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공항에서 수화물 부치는데도 센스있는 남동생이 수화물이 초과할 것을 우려하여 작은 기내 캐리어를 가지고 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생의 예상은 적중했다.
동생 덕분에 추가 요금 없이 수화물을 처리하고, 출국장에서 작별의 순간이 왔다.
한 달 동안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해준 동생네 부부, 그리고 올케언니의 세심함은 늘 감동이었고 고마웠다.
애증의 관계인 우리 아이와 조카!
아들 둘이 함께하는 한 달간의 여정은, 올케언니도 나도 해탈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일 때 보다 둘이라 좋은 것도, 두 아이가 잘 놀 때만 좋은 것도, 싸우기라도 하면 좋은 시절이 다 간다는 것도 두 아들 스스로가 더 많이 배우고 느꼈을 터이니.
아쉬움의 포옹으로 형아인 우리 아이가 동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놀러 오라고, 우리집에 로봇 많다고, 한국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Bye Bye~
아시아나항공 OZ542편이 우리가 탈 비행기임을 전광판과 항공권을 통해 아이에게 알려주었고, GATE로 가는 길 내내 OZ542 타고 간다고 계속 곱씹으며 말하는 아이가 참 사랑스럽기도 했다.
✈️
저녁 비행기지만 자리는 만석이었고, 다행히 복도 쪽으로 좌석을 변경해두었기에 올 때처럼 화장실이 불편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앉을 좌석에 창가 쪽이 비어있길 바랐으나, 어김없이 누군가 앉아있었다.
키가 190cm로 보이는 독일인인데 나보다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듯 했다.
이륙 준비가 끝나고, 내가 그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Excuse me, Where are you from?”하고 국적부터 묻자 환하게 웃으며 독일 사람이고, 이름은 Chris라고 했다.
서로 마스크를 끼고 있는 데다가 가운데에는 우리 아이가 앉아있다보니 소통이 원활하진 않았지만, 어떤 목적으로 한국 가시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나 또한 창가 좌석의 불편함을 알기에 화장실 가고 싶을 땐 anytime! 언제든지 얘기해달라고 미리 전달해주고 싶었다.
서툴지만 나의 의도를 전하며, 크리스가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반해 공부하고 있는 직장인이고, 그가 18일간 한국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시간은 11시간50분가량, 복도 쪽 좌석에 앉아 신경 쓸 게 많은 나와 달리 가운데서 우리 아이는 12시간 동안 먹고 놀고 자고 잘 하면서 기내생활을 온전히 즐겼다.
그러다 올 것이 왔다. 아이의 취침 시간.
나도 너무 졸린데, 자꾸만 Chris 아저씨를 향하는 아이의 발 때문에 그 발로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안 넘어가게 하려고 아이를 휘감았다.
자세를 한 번씩 바꿀 때마다 좁은 기내에서 뜻대로 되지 않음에 힘들었지만, Chris 또한 이해해 주었고, 내가 출발 전 해준 배려 덕분이라는 생각에 나에게도 배려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할 때보다 귀국할 때 비행시간은 짧았지만, 왜 이렇게 한참을 가도 가도 인천국제공항이 멀게만 느껴지던지 중간에 기내식을 선택할 때도 Chris는 비빔밥 같은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식사를 골라서 먹었는데,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배우는 외국인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다.
착륙 후 내리기 전, 긴 시간 비행 동안 우리 아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손짓·발짓으로 전달하고, 만약 18일 여행 동안 시간이 허락한다면,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물론 주로 서울에만 있을 계획이라기에 난 서울 말고 한국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경주와 안동 그리고 영덕을 와보면 좋을 거다! 하고 알려주었다.
🛬
9월 중순 즈음, Chris에게 초대해주어서 너무 감사하지만 예정된 일정들이 있어 내려오기는 힘들 것 같다고 너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서울에서 4시간정도 걸리는 거리라 부담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은 신랑은 독일사람들의 약속에 대한 마인드에 관해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독일 사람들은 약속을 정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대! 정말 영덕으로 초대할 생각이었어!?” “물론이지!”
서울이었다면 기내에서의 우연이 우리 가족과의 인연으로 연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쉬움이 있으면 또 언젠가는 인연이 닿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따금 아이와 Chris 아저씨 이야기를 한다.
공항으로 가기 전 동생네 가족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우리가 묵었던 방에 두고 왔는데, 한국 도착한 뒤 우리 올케언니에게 감사하다며, 장문의 카톡이 와있었다.
누구보다도 고생했을 올케언니, 좋은 추억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과 건강히 다시 또 보자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했다.
언제 또 내 동생의 가족들을 볼 수 있을는지 기약이 없기에, 아마 나중에 우리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조카가 초등 고학년이 되어 보게 될 수도 있겠지?
정 많은 그녀, 내향적 성향임에도 무던히 친근함을 내 비춰준 올케언니 덕분에 이번 한 달 여행이 내겐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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