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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를 좋은 리더로 성장시키는 방법

살면서 공식적으로 지목되어 리더가 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리더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즉 문화가 리더십을 길러준 것이다.

따르고 싶은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리고 나의 아이는 어떤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가?

리더십을 측정하는 수많은 테스트가 공통으로 언급하는 것은 소통·존중·인내·신뢰·이성·도전이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배려할 줄 아는 것을 첫째로 꼽는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 ‘마음을 읽어주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일까?

공감을 한다는 게 단순히 상대방이 슬프다고 하면 ‘슬프구나~’라고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수 있고 위로하고 배려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 선다는 것 자체가 안되는 성인이 너무나도 많다.

협상이나 합의의 과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발생하는데 매번 자신의 상황만 주장하는 어른들이 너무나도 많다.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경우도 많다.

그런 부모 아래 아이가 공감을 배울 수 있을까?

단어 자체는 쉽고 익숙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이 소통과 공감, 배려인 것 같다.

*

아이와의 소통은 반드시 대화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이가 대답을 안 하는 순간, 멍한 순간,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과하게 웃는 순간, 엄마에게 계속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순간…

이 모든 순간은 아이가 소통을 원하는 신호이다.

엄마가 피곤해서, 다른 할 일이 많아서, 혹은 마음이 급하면 이런 신호들을 놓치기 쉽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신경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이와 무언의 소통이 가능해진 후에야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한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부모 눈치를 많이 본다. 말이 적은 아이가 있고 많은 아이가 있지만, 전혀 안 하는 아이는 부모와의 소통이 필요한 경우이다.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어보기 전에 일단 안아주고 짧은 시간이지만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해주자. 아이들은 유치원에 없었던 엄마가 자신과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엄마가 알고 있을거로 생각하거나 혹은 유치원에서 속상했던 경험을 엄마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안아주고 보고싶었다고 이야기해주면서 엄마는 네 편이라는 것을 먼저 알려주고, 엄마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가 먼저 이야기해준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엄마는 이때 기뻤어~ 엄마는 이때 속상했어~ 엄마는 지나가는 어떤 아이를 보면서 우리 00이는 유치원에서 뭘 하고 있을까 궁금했어~”

이런 식으로 먼저 이야기해주면서 엄마와 아이가 다른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고, 아이는 엄마에게 말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준다.

한두 번 한다고 아이가 바뀌지 않는다. 몇 달, 혹은 1년 이상 지속해야 한다. 

리더십은 소통이며 문화이다. 집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엄마나 아빠가 어떻게 하는지를 아이들은 지켜보고 있다가 모방한다.

부모가 소통하려는 의지를 갖추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그것이 가끔은 받아들여지고 가끔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단단해진다.

소통의 과정이 있으면 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꼭 유치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이 없다면,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함이 쌓이고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소통의 과정이 없이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순종과 복종만이 부모와 관계를 어긋나게 하지 않는 거라고 학습되어 온 아이는, 자신 또한 친구들과, 혹은 성인이 되어 부하직원에게 강압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소통하라는 이야기는 오랜 기간 많은 매체에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소통하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여 조부모님의 기분을 맞춰주듯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놀이터에서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자~ 더 놀고 싶지? 미안해~ 이제 가서 저녁 먹을까?”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는 아주 잘못된 사례이다. 

여기서 “~갈까?”의 청유형은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집에 갈까? 저녁 먹을까?”라는 물음에 아이는 “아니, 더 놀 거야”라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어른들에게 통용되는 청유형 물음은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호통치며 무서운 표정을 지으라는 게 아니라,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미안해”라는 뜻은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고자 하는 엄마의 의지이다. 하지만 기분을 맞춰준다는 건 다시 말하면 기분이 상할 것이 두렵거나 꺼려진다는 것이다.

아이의 기분이 상할 것을 꺼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주겠다는 의도로 비칠 수 있고, 아이들일수록 이것을 잘 간파하여 이용하려고 한다.

가기 싫다고 떼를 쓰고 “나는 더 놀고 싶다고 말했잖아! (아까 물어봤을 때 대답했잖아)”라고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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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성공 신화를 모방한다고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성공을 리더십이라고 오해하지 않아야 내 아이에게 건강한 리더십 문화를 만들어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이야기를 앞으로 하고자 한다.

첫째, 변화를 잘 받아들이는 아이는 자신감이 높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

부모인 우리 때보다 우리 자녀들은 더 예민한 것 같다. 장소를 옮기는 것에 거부감이 크다. 집에서 놀다가 놀이터를 나가기도 어렵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힘들다.

“이제 00로 가자~”라고 했을 때 바로 움직이는 아이들보다 못 들은 척하거나 싫은 티를 내며 같은 장소에 머무르고자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예민한 아이들은 변화된 장소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번 적응한 곳에 계속 머무르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장소를 옮기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고난 기질이 예민하더라도 부모가 성공 경험을 시켜주고 인지하게 도와주면 아이의 예민한 기질은 낮아질 수 있다.

먼저, 노는 장소의 경계를 정해주고 시간을 정해준다. 

놀이터에서 몇 분까지 놀라고 미리 시간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20분 남았다, 10분 남았다, 5분 남았다.. 이렇게 남은 시간을 알려주어 아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시간을 준다.

시간이 다 되었으면 질질 끌지 말고 단호하게(무섭게 말고) 이야기한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집에 간다고 말이다.

놀이터와 같은 실외 공간은 경계가 없으므로 어떤 선을 보여주며 경계를 지어주어야 아이도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다.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디까지 가야 할지 몰라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놀게 되고, 너무 멀리 가서 부모가 잡으러 오면 그것을 놀이라고 착각하고 패턴화될 수 있다.

키즈카페와 같은 한정된 실내 공간이라면 정해주지 않아도 아이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을 것이다. 몇 시까지 놀고 간다고 미리 알려주면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다. 중간중간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이동할 장소에서 있을 즐거운 일을 미리 이야기해준다. 순조롭게 떠났을 때는 칭찬과 함께 부모의 기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가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이동 후 새로운 장소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거봐~ 여기도 즐겁지? 아까 놀이터에서는 너무 즐거워서 떠나기 싫었는데, 이동해도 또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네?”와 같이 아이가 인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렇게 아이에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혀 가보지 않은 숲, 바다, 수영장 등의 체험 또한 도움이 되는데, 첫 경험은 반드시 부모와 함께 하자. 아이가 두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변화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에게 있어서 변화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

세상은 단 한 번도 변화를 멈춘 적이 없으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부모가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한다고 아이에게 공무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안전장치만을 찾아다니게 한다면 세상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게 된다.

둘째, 양육의 목적은 자녀의 독립이다.

양육에 대한 대전제는 아이를 독립시키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분명 강아지를 기르는 것과 다르다.
강아지의 밥을 챙겨주고 대소변을 가리게 하는 것 혹은 치워주는 것은 개 주인으로서 평생 해야 하는 일이다. 강아지는 길러서 독립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가 스스로 먹고 대소변을 가리게 훈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이를 독립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편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모든 결정을 대신해주며 부모가 죽기 전까지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다.

이런 부모 아래 자란 자녀는 결혼 후에도 독립하지 못하거나 부모의 간섭에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결혼할 때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거나 결혼 후 생활비 도움을 받는 가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부모는 왜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어느 정도까지의 간섭이 간섭이 아닌 도움인지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경제적 도움을 주는 부모는 본인이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경제적 지원을 무기로 자녀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자녀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이 같은 마음가짐은 자녀가 어려서부터 악영향을 미친다.

이쯤에서 부모로서 나는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아이가 대기업에 들어가서 잘리지 않고 큰 사고 안 치고 잘 다니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인생을 계획해서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는가.

저자는 개인적으로 후자를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면 그게 공부건 장사건, 적극적으로 열심히 할 것이며,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부라면 ‘공부해라’ 다그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할 것이다.

셋째, 다양한 경험이 메타인지를 키워준다.

부모가 메타인지 능력이 높다면 자녀도 높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유전이 아니라, 생활방식 때문이다.

저자는 아이가 50일쯤부터 매일 수영장에 데리고 갔다.

영국에서 살던 빌라 단지에는 공용수영장이 있어서 매일 이용할 수 있었다.
엄마의 몸 안, 물속에서 살다가 태어난 아기는 보통 물을 좋아한다.
그 기억이 남아있을 때부터 물을 접하게 해주면 물에 대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물론 수영장 물은 양수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100일 때부터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굳이 해외로 여행하지 않아도 식물원, 박물관, 미술관 등을 많이 데리고 다녔다.
아이의 기질이 예민하다는 것을 만 3세가 넘어가면서 알게 되었고, 더욱 악착같이 바깥으로, 새로운 환경으로 데리고 다녔다.

예민한 아이는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집에서 놀다가 놀이터를 나가기도 어렵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기도 어렵다.

당연히 도전도 가능한 한 하지 않으려고 하고 안정적인 상황을 선호하게 된다.

아이가 여행과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덕분에 예민한 기질이 약간 상쇄되고 도전정신이 커졌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유치원을 바꾸거나 하는 변화가 있어도, 오래 다닌 아이들처럼 적응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적응을 잘한다는 건 새로운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찾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메타인지이다.

어느 날 떼를 써서 엄마인 저자를 잔뜩 화나게 하고는 “엄마, TV 봐도 돼?”라고 물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대답했더니, 약 5초 후, “음… 엄마~~ TV 봐도 돼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메타인지이다.
자신의 실패를 모니터링한 후 가능한 방법(존댓말+예쁘게 말하기)을 모색했으니 말이다.

성공의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승낙했다.
(매체만 안전하다면) TV를 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TV를 보게 되는 과정과 보고 난 후의 상황 등, 아이가 TV 보는 것을 어떻게 여기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메타인지를 키워줄 수도 있고, 단순한 보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아이가 더더욱 TV나 게임에 목메달게 하는 방법이, “공부 1시간 하면 TV 보여줄게” 등의 보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TV나 게임이 보상되면 안된다.

메타인지도 방해할뿐더러 공부하는 목적이 공부를 위한 게 아니라 TV를 보기 위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의 메타인지를 키워주는 또 한가지 방법은, 아이의 반응을 민감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등은 관찰을 통해 알 수 있고 이것은 같이 사는 부모만 알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사소한 관심은 바뀔 수 있지만, 내 아이의 능력치를 알고 있다면 나중에 이과 갈지, 문과 갈지에 대한 고민 따윈 하지 않을 수 있다.

***

나는 감정으로 결정하는가, 이성으로 결정하는가.

감정으로 결정하는지 이성으로 결정하는지조차 모른다면 분명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를 것이다.

한국은 감정으로 결정하는 부분을 옹호해왔다.

‘욱한다’, ‘기분파’, ‘츤데레’ 등의 용어가 그 예이다.

욱한다는 것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한다.
말다툼 중 한 사람이 ‘욱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집을 나가거나, 사람을 때리는 행동은, 행동만 보면 폭력 그 자체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폭력을 ‘욱한다’로 용서하는 것일까?

기분파는 기분이 좋으면 남들에게 돈을 잘 쓰는 사람(내가 쏠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돈을 버는 방식은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노동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기분파가 돈을 쓰는 방식은 왜 감정에 의해 결정하는 것일까?

츤데레는 평소의 행동은 무례하거나 무심하지만, 가끔씩 친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가령, 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 무뚝뚝하게 자신의 옷을 벗어서 걸쳐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애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행동 자체를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추울 때 옷을 벗어서 걸쳐주는 행동은 친절하지만 그게 그토록 감동할 일인가? 평소의 행동을 보면 불친절과 무례함으로 무장한 사람이 가끔 한번 친절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사실은 따뜻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변덕이 심한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한국문화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진심을 보려고 한다고 하였다.

행동보다는 마음을 보려고 하므로 감정적인 결정에 너그럽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진심만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모든 것을 나의 주관대로 판단하기에 다다른다.

내 감정이 그러니까 무조건 옳고 나는 권력자니까 당신들은 내 감정을 캐치하라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이가 ‘엄마는 TV 보는데 왜 나한테는 숙제하래?’ 등 공정함을 걸고넘어지며 따지고 든다면, 감정적으로 욱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어디서 엄마한테 따지고 들어?”라며 소통을 뒤로하고 억압한다면 아이는 억울함을 누른 채 방에 들어갈 것이고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화난 마음을 달래기 위해(회피)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평소에 부모로서 감정으로 결정하는가, 이성으로 결정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위 사례에서 아이의 말을 번역하면 “엄마가 TV를 보고 있어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 나도 TV가 보고 싶은데…”라는 뜻이다.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이다.

TV를 끄고 “그래. 공부에 방해가 됐구나. 그럼 같이 공부할까? 엄마는 옆에서 책 읽을게”라고 할 수도 있고, “힘들면 잠깐 TV를 같이 보고, 그 후에 같이 공부할까?”라고 선택의 기회를 줄 수 있다.

아이의 말투, 태도에 순간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나의 판단력이 사로잡힌다면 미성숙한 부모이다. 아이들은 미성숙한 부모를 잘 간파한다.

그게 미성숙인지 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의 신뢰를 잃는 것이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부모는, 강요하지 않아도 자녀들의 존경을 받는다.

****

자기조절능력, 참을성, 인내심

리더십, 메타인지, 성경, 불교, 자기주도학습, 유교 사상.
이 모든 분야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참을성이다.

이것을 인내심이라고도 하고 자기조절능력(Self-regulation, Self-control)이라고도 한다.

자기조절능력이 교유관계에 미치는 영향, 자기조절능력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 등 자기조절능력에 관한 연구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져 왔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시멜로 실험’도 자기조절능력에 관한 연구이다.

마시멜로 실험이란, 1960년 스텐포드 대학의 연구진이 3~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아이가 혼자 방 안에서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5분을 기다린다면 마시멜로를 한 개 더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참은 아이는 추후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 실험의 결과였다. 

현재는 많은 비판이 있기는 하다. 

부모가 약속을 잘 지켰던 아이는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렸고, 부모가 약속을 잘 못 지켰던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먹었든지, 마시멜로를 쉽게 사 먹을 수 있던 부유한 아이는 참을 수 있었지만 마시멜로를 쉽게 사 먹지 못한 가난한 아이는 참지 못했다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비판이다. 

어찌 됐건 자기조절능력은 오랫동안 연구됐고 지금도 교육학·심리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욱한다’, ‘뒤끝이 없다’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옹호해주는 표현 또한 많다.

물론 요즘에는 ‘욱하다가 골로 간다’, ‘너는 뒤끝이 없겠지만 당한 나는 있다’ 등의 표현으로 자기조절능력의 부족은 처참한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이 말이 원래의 ‘욱한다’, ‘뒤끝이 없다’만큼 대중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화했을 때 분쟁이 해결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이다.

하지만 무조건 위협적으로 소리를 확 질러버린다든지, 목소리만 크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이 먹히는 사회가 있다는 것은 씁쓸한 사실이다.

그런 사회에서 이성과 합리성, 도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자의 세계처럼 목소리 큰 사람의 논리가 항상 맞아야 하고 권력있는 사람은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용서받는다. 도덕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너도나도 권력의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위험한 순간은 내게는 기회가 되고 우정은 기회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세계 안의 사람들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눈앞의 이득과 기회만을 좇아가고 멀리 보지 못한다. 당연히 메타인지나 리더십은 생각조차 해볼 수가 없다. ‘욱한다’, ‘뒤끝 없다’는 말을 내가 자주 쓰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가능한 한 멀리해야 한다.

나도, 내 아이도 그 사람의 도덕적 모호성에 오염될 수 있다.

내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부모 개인으로서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지만, 아이가 사는 사회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문화는 내가 의식하기 전에 피부로 흡수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는 부모로서 내 아이를 어떤 문화에서 키우고 싶은지 고민해 보아야 할 때이다.

자기조절능력과 참을성은 아이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부모는 ‘할 수 있는 것’이 추가된다.

아이들이 하고싶은 것을 선택하는 습관이 생긴다면 부모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좁아지고 해야하는 것만 하고 살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과 가정환경, 훈육을 통해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는 힘이 생긴다면 성인이 되어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많아지고, 그때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예를 들어, 첫 월급을 받은 20대 청년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월급을 다 써버렸다.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고 친구들에게 밥을 쏘고 늘 사고 싶었던 작은 명품도 하나 샀다. 

자신을 바라보는 힘이 있고 자기조절 능력이 있다면, 이 실수는 첫 달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판단하며 자기조절능력이 없는 청년은 같은 실수를 매달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힘들면 사표를 내고 이직하고, 나중에는 나이 제한에 걸려서 적은 월급을 주는 곳으로 낮춰서 취업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사업을 해보았지만, 끈기가 없어서 실패하고 결국은 가난한 노년을 맞이한다. 

(가난한 노년을 맞이한 모든 사람이 이러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 열심히 살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은 성실한 분들도 계시므로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노년을 맞이한 이 사람을 우리는 어떻다고 묘사하는가?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다고 표현한다. 
성실성과 책임감은 모두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감정적인 결정을 수용하는 표현은 권위자에게만 붙는다. 

이 청년의 무책임한 ‘행동’은 성장기에 자기조절능력을 키울 기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아 때부터 자기조절능력을 습득한 청소년기의 학생이 있다.

오늘따라 숙제가 많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렸고, 엊그제 시작한 게임만 머릿속에서 맴돈다.

어차피 아픈 거 좀 더 과장해서 심하게 아픈 척하면 엄마가 게임을 시켜줄 것 같다. 숙제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것도 심하게 아팠다고 하면 크게 혼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찝찝한 기분이 올라온다.
‘사실은 숙제를 할 수 있잖아. 아프긴 하지만 그 정도는 후딱 해놓고 쉬면 되잖아.’ 자기조절능력이 있는 이 학생은 감정이 결정하도록 놔두지 않고 이성적으로 결정하기로 한다.

너무 아프지만 일단 한 개의 숙제를 해본다. 막상 숙제를 시작하니 아픈 것도 잊고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숙제를 다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게임을 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기분이 상쾌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당당하다.

이 학생은 메타인지가 가능하고, 또한 리더십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당함이 지표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다.
남을 속이는 것보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더 큰 해를 입힌다. 작은 속임수는 나의 수치심을 자극하고 그것이 쌓이면 절대로 당당할 수 없다.

매번 자신과 상대방을 속이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르지 않는가. 위선자는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에 속아 그것을 진실로 믿기까지 한다.

당당함이 지표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

유아부터 참을성, 자기조절능력을 길러주면 성숙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길러줄 수 있을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행동지침은, ‘기다리기 연습’과 ‘참기 연습’이다.

만 5세부터는 이 두 가지 연습이 꼭 필요하다.

유아기 아이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기다리는 것인데, ‘기다리기 연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끝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상태에서 기다리기

2.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기다리기

1번보다 2번이 훨씬 어렵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기다리기 연습을 할 때는 반드시 1번부터 시도해야 한다.

은행에서 기다리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지금은 은행에 가면 번호표를 부여받고 전광판에서 몇 번을 호출하는지 볼 수 있다. 현재 번호와 내 번호를 비교하면서 얼마나 걸릴지 대략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전광판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걸리는지 알지 못하고 무작정 기다렸어야 했다. 그 당시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는 항의가 많았고, 사람들은 길게 기다리지 못했다고 한다.

번호표와 전광판 제도를 도입하고 난 후, 항의와 기다리는 시간을 비교해 본 결과, 전광판을 도입한 이후 2배 이상 오래 기다렸고 항의수가 크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것을 통해 성인들도 예측 가능한 기다림보다 예측 불가능한 무작정 기다림에 더욱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유아기 자녀에게 도입해보자.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뒤늦게 타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기다려주기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예측할 수 있는 기다림이고, 그 사람이 뛰어오는 모습을 아이 눈으로 보고 있으므로 차분하게 기다려줄 수 있다.

그 사람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아이는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그다음은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연습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언제 닫힐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기다림’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이는 견디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기다림을 통해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예측할 수 있는 기다림’으로 바뀐다. 언제쯤 닫힐지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점차 늘려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10초, 30초, 1분, 5분… 아이가 참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다고 휴대폰을 쥐여주면 아이는 ‘소란을 피우면 티비를 볼 수 있네?’라고 학습하게 된다.

나쁜 행동을 했는데 보상이 따라온 것이다. 이 악순환은 아이가 성장할수록 끊기가 힘들 수 있으니 (아이마다 다르다) 처음부터 조심해야 한다.

만5세부터 기다리기 연습을 시작하자.
나중에는 엄마가 바빠 보이면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참기 연습’이다.

기다리는 연습도 일종의 ‘참기’이지만, 여기서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기의 의미가 강하다.

친구가 장난감을 빼앗아 갔을 때, 감정을 참지 못하고 때리거나, 때리면서 빼앗는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 혹은 친구의 장난감인데 너무 멋져 보여서 빼앗는 아이들도 있다. 이것은 아이가 감정 조절 연습이 아직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의 모든 행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명심하자. ‘감정 조절 연습이 안되서 나쁜 행동이 결과로 나왔다’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태어나자마자 감정 조절을 할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으며, 부모는 그것을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참기 연습은 많은 가정에서 이미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콜릿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밥을 먹고 나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는 밥을 먹어야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밥 먹을 때까지 참는다.

이때 한 가지만 추가해주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지금 참기 연습 중이라고 알려주는 것, 참기 연습을 아주 잘했으니 보상이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대형 쇼핑몰에 놀러 갔고 키즈카페에 향해 걸어가는 중, 공연을 시작했다.

청각이 예민한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이럴 때 부모가 해줘야 하는 것은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소음이 작게 들리니 아이가 다시 침착해졌다.

하지만 소음이 나는 곳으로 다시 가고 싶어 한다. 키즈카페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는 키즈카페에서도 소음이 시끄러울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를 설명해주지만 아이는 고집을 부린다. 이것은 아이가 아직 인지능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조금 전 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잊어버리고 키즈카페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능력은, 아이들이 거리 측정을 잘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직 시신경이 성장 중이기 때문에 높은 거리를 가깝다고 잘못 인식해서 2층에서 뛰어내리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혹은 달리는 차보다 자신이 빠를 것이라고 잘못 인식해서 차도로 뛰어드는 것도 인지능력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고집을 부리니 보통 부모들은 말을 안 듣는다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무서운 톤으로 화나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하지만 이때 아이에게 참기 연습을 시킬 수 있다. 먼저 예측할 수 있는 상황임을 알려준다. 공연이 얼마간 지속될지 찾아본 뒤, 언제 끝난다고 알려준다.

가령 20분 뒤에 끝난다고 하면, 아이가 20분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를 아이의 관점에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저자의 아이는 헬로카봇 노래가 기준이다.
헬로카봇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르는 시간이 1분이기 때문에, 헬로카봇 노래를 20번 부르면 저 소음이 없어질 거라고 얘기해준다. 그 후 20분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를 의논하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아이는 참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참고 상황을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그 후 20분간 다른 것을 하면서 기다리기 연습하고 있는 거라고 이야기해주면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억압적인 환경에 노출된 아이는 모든 감정을 ‘화’로 표출할 수 있다.
슬픔, 서운함, 속상함, 외로움, 심심함 등 다양한 감정을 스스로 읽지 못하고 항상 떼를 쓰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때는 대화를 통해 어떤 감정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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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되어야 존중도 할 수 있고, 참을성과 자기조절 능력이 높아지며, 관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자기 능력을 계발하여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해결을 하고 전략을 짤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자신감이 올라가고 두려움을 깨고 도전해 볼 용기가 생긴다. 

아이들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 자녀에게 맞는 방법을 고민하고 찾아보고 시도해보면 된다.

내 아이에게 맞는 ‘기다리기 연습’과 ‘참기 연습’의 방법을 찾는다면 참을성, 인내심, 자기조절능력을 키울 수 있고, 이것은 이성적인 사고의 밑거름이 되며, 메타인지를 통해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 아이, 리더십 역량이 강한 아이로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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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이름없음
    1년전

    통찰력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이*애
    1년전

    기다라기 연습,참기연습 구체적인 예로 잘 들었습니다.
    아이가 변화 하는 게. 한두 번 해서 되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
    키우는 이의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이 먼저 겠군요.
    메타인지 학습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 하겠네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