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하니 32년의 피아노 레슨을 마무리한 마지막 날 저녁부터 지금까지 수업했던 그 많은 아이들과의 추억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 삶의 현장 속에 몰입되어 살아내느라 기억 저편에 두고 왔나 보다.
며칠 동안 나를 스쳐 갔던 학생들 하나하나 기억하다 보니 우리들의 음악회가 떠오르며 조금씩 나의 추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
수업을 통해 삶이란 무얼 하든지 낯설고, 실수투성이였다가 반복하면서 익숙해지고 나만의 노하우를 찿다가 전문적으로 성숙해진다고 배웠다.
1년 차, 10년 차, 20년 차,30년 차를 거치며 나의 변화는 굉장했으니까.
이제 그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어설픈 좌충우돌 이야기 1.
나는 고3 실기시험 다음 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동안 부모님께 부담을 많이 드려서 도움을 받는 게 죄송했다(그 당시 아빠는 오래된 병환을 힘겹게 이겨내려 치료를 받고 계시는 중이기도 했다).
내 힘으로 해결하고자 수업을 시작했던 나의 첫 제자 은교는 지금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 딸이었고 그 당시 교회 반주를 하고 있었기에 쉽게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었다. 언니라고 부르며 반주하는 나를 부러워했던 그 아이는 가르쳐 주는 것마다 너무 재미있어했다. 처음 시작한 나만의 수업이라 정말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고 대화도 많이 하며 수업하고 식사도 간식도 함께 나누며 정을 쌓아 갔다.
사실 나는 피아노 연주보다는 가르치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하나씩 알아가는 걸 지켜보는 그 느낌이란 덩달아 내 마음이 꽉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5년을 가르쳤던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중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은교와 통화한 적이 있는데, 학교 음악 선생님은 주로 성악 전공 하신 분이 대부분이어서 피아노 치는 게 서투르신 경우가 많다며 필요한 상황에서는 자기가 직접 친다고 이야기했다. 그럴 때 나는 키가 커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맘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런 아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경험이 쌓일수록 느낄 수 있었다. 한 번도 가르쳐 보지 못한 내가 열정만으로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시기였다.
절망적인, 그야말로 아이를 한 번도 다루지 못했던 쩔쩔매는 1년 차 선생님이라는 걸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해 주는 학생도 있었다. 작고 마른 여자아이는 수업하기 싫다며 피아노 뚜껑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선생님 싫다는 소리가 왜 그리 서운했을까…
용기를 내어 보았지만, 처음부터 피아노가 어렵다는 녀석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졌다. 가르치는 것에 너무 서투른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다시 만난 다섯 살 반 여자아이, 나래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노란 명찰을 달고 수줍게 인사하는 아이를 만나면서부터 1년 차 선생님으로서의 여정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며 배우고 느꼈던 수업을 기억하며 칭찬, 노래, 음악감상 등등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며 내가 가르친다는 느낌보다 같이 자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까?
그 아이와의 수업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음악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즐기는 그 아이가 너무 신기했다. 음표, 박자도 이해를 정확하게 했고 슬픈 음악을 쳐 주면 눈물이 그렁그렁, 신나는 음악을 쳐 주면 춤을 추던 그 아이, 나래. 내 얼굴을 그려 주면 나는 반주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다섯 살 반부터 5학년이 끝날 때까지 사춘기도 같이 넘기며 함께 조금씩 선생님이 되어 갔다.
초등학교 1학년에 만난 다른 학생 동욱이는 지금은 든든한 두 아이의 아빠지만 나를 만난 첫날에는 피아노 책 첫 장을 보며 처음 보는 악보가 어렵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설득하고 칭찬하며 극복해 가는 과정을 거치며 점점 좋아지며 피아노를 즐길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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