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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의 리더십을 방해하는 요소들

리더십 있는 아이로 성장하려면 마음의 거울을 잘 들여다보야아 한다. 

자기 마음의 거울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은 무엇에 방해받는 것일까? 

아이가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볼 수 없고, 나아가 거울이 흐릿해진 원인은 감정에 있다. 

*

아이의 정서발달에 해가 되는 감정 세 가지를 꼽자면 억울함, 수치심, 공포감이다. 

억울함

억울한 감정은 쌓이고 쌓여 자기 비난으로 이어지고 자신을 비난하는 강도만큼 남 탓/환경 탓을 하게 되는데, 전통적인 유교주의 문화인 한국은 아이에게 억울함을 쌓이게 한다. 

“부모에게 대들지 마라” “복종해라” “토 달지 말아라” 등의 말들이 그 예이다.

어른은 살면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존중과 존경을 표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내가 숨 쉬는 것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에는 선대의 경험과 노하우보다 변화를 읽는 눈,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필요한 분야나 시기가 있다.

부모는 자신의 가치관·경험과 자녀 세대의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혼내고 벌을 주는 것은 억울함이 쌓이는 순간이다.
벌을 주더라도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벌을 줘야 한다. 

부모는 경외의 대상이기 이전에 아이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판단하기 이전에 아이의 편이 되어줘야 한다(아이가 잘못을 했는데도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뜻이 아니다).

아이는 감정의 위협을 받게 되면 일단 살아남기 위해 복종한다. 처음에는 억울하지만 참는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다 보면 ‘내 부모와는 말이 안 통해’라고 판단하고 어떤 대화도, 의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억울함이 쌓이면 슬픔·상실감·서운함 등의 감정을 모두 화로 표현한다. 

이것을 사춘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춘기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고뇌하는 시기인데, 억울함으로 가득 찬 아이의 사춘기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이 그간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래서 지금 부모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이 마음으로 가득 차 정작 고민해야 할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서는 고뇌할 겨를이 없게 된다. 

‘올 것이 왔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한다.

아이가 그간 얼마나 억울했는지 토로한다면 발전이 있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마구잡이로 비난하면서 감정을 토로한다면 논리적으로 따지지 말고, 아이의 태도에 격분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줘야 한다.

“그간 그렇게 힘들었구나… 그때 그런 마음이었구나…” 이렇게 마음을 읽어주면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화가 눈 녹듯이 사그라든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변명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이랬어. 아빠는 이랬어.” 라는 덧붙이는 말을 하면, 아이는 부모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 것에 후회하게 된다. 

아이의 마음이 풀리려다가 오히려 더 화가 쌓이고, 관계가 가까워지려다가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남아의 경우 만 5세에 첫 사춘기가 온다고 한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우주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며, 자신은 그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

이때 아이에게 규율과 태도에 대해 훈육만 한다면 아이 마음속에 억울함은 이때부터 쌓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훈육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만5세는 훈육이 필요한 때이고, 훈육을 하지 않으면 도덕적 기준을 상실해 오히려 아이를 망친다.

훈육은 하되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이해해줘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 깜빡하는 경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고 훈육만 해서 아이가 억울해하는 경우, 부모는 자기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아까 혼내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이의 혼란을 일으킨다. 차라리 “아까 00이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고 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잘못한 행동은 상기시켜줘야 한다.

공포

흔히 부모는 혼낼 때 큰소리로 엄하게 무섭게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공포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충격요법이라고도 하는데, 아이가 잘못했을 때 크게 혼나면 그것에 대한 공포감이 심어져서 다음번에 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의 기억 속에 자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공포가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큰소리나 화난 표정과 같은 즉각적인 감각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집은 아빠가 무섭다. 엄마말은 안 듣는데 아빠 말은 잘 듣는다. 

숙제를 미뤄도 아빠가 큰소리로 호통치고, 엄마한테 대들어도 아빠가 큰소리로 화를 낸다. 그러면 아이는 ‘숙제를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 대들지 않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빠 눈치만 보게 된다. 

아빠의 표정과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가능한 아빠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숙제를 미뤄도 아빠에게만 걸리지 않으면 되고 엄마에게 대드는 건 아빠가 없을 때만 대드는 것이다. 

아이가 누군가의 눈치만 보고 산다면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어지고 집도 편안한 공간이 아니게 되며, 불안이 쌓이게 된다.

리더십은 메타인지가 되어야 가능한데, 이 상황에서는 메타인지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타인의 눈치만 보는 리더는 리더십이 있다고 볼 수 없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판단 아래 당당한 아이로 키우려면 공포심을 자극해서는 안된다. 

수치심

유교문화에서 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훈육방식이 수치심 자극이다.
옛날에는 아이가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누는 실수를 하면 키를 뒤집어씌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 온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의 실수를 알려 수치심을 주고, 그 수치심에 대한 보상으로 무언가를 얻어온 것이다. 

수치심에 적응되면 강박·중독이 생기고, 관계에 집착한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능력을 상실하고 ‘타인이 봐주는 나’만 남는다. 

외로움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친구가 떠날까 봐 무조건 친구에게 맞춰준다. 가난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자신의 가난을 들키지 않기 위해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학교를 중퇴한 부모는 아이가 좋은 대학을 보내어 대리 만족하려고 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음식에, 술에, 일에, 운동에 집착하고, 강박적인 증세를 보인다. 이것을 수치심 중독이라고 하는데, 유교문화인 한국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수치심 중독일 것으로 추측한다.

자신의 모든 선택에 불신을 갖게 되며 당연히 자신감은 하락하고 모든 것이 타인이 기준이 된다. 수치심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잃게 하고 타인이 기준이 되게 만듦으로서 리더십은커녕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수치심은 생활 속 사소한 행동에서 발생된다. 가령, 아이가 옆에 있는데 엄마가 다른 엄마에게 이불에 실수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이는 수치심을 느낀다. 혹은 엄마가 아이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과장해서 거짓말하여 아이가 칭찬을 받을 때에도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억압과 통제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이가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 

억울함·공포심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아이로 키우려면 아이의 수치심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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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생활 속 사소한 행동에서 발생한다.
아이가 옆에 있는데 엄마가 다른 엄마에게 이불에 실수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이는 수치심을 느낀다. 혹은 엄마가 아이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과장해서 거짓말하여 아이가 칭찬받을 때도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억압과 통제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아이가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

문제는 내가 권위자의 위치일 때(부모는 자녀에게 있어서 권위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사람에게 억울함·공포·수치심을 자극하기가 쉽다. 효과가 빠르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서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고 자신의 눈치를 보며 신경 거슬리게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훈육방식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아이는 만 4세,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고 집에 친구가 놀러 왔다.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로봇을 좋아하듯이 이 두 아이 모두 하나의 로봇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한다.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는 소리를 들은 집주인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른바 ‘쥐잡듯이’ 잡았다.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같이 노는 거라고 했지? 친구가 손님인데 양보하라고 했지?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장난감 다 빼앗아 갈 거야!" 

때리지는 않지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아이가 엉엉 울 때까지 혼쭐을 내줬다. 

밖으로 나온 아이는 친구에게 장난감을 양보하고 ‘사이좋게’ 놀기 시작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엄마는 만족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

정답은 ‘총체적 난국’이다.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주장할 권리를 빼앗겨 버렸으며, 무얼 잘못했는지 모른 채 혼나는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장난감을 뺏긴다’는 공포감이 밀려들어 왔다. 엄마가 큰소리로 자신을 혼내는 걸 친구와 친구 엄마도 들어버렸으니 수치심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가 흘린 눈물은 억울함, 공포감, 수치심 모든 감정의 집합체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장난감은 사전에 숨겨 놓는다. 아이는 친구가 오기 전에 장난감을 숨김으로써 친구가 그 장난감을 만질까 봐 노심초사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친구라고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막상 친구가 오니 반가운 마음에 숨겨놨던 장난감을 들고나와서 같이 놀자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경우,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에겐 선택의 기회와 고민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인지, 그리고 메타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아이는 친구와 갖고 노는 게 더 좋을지, 그냥 숨겨놓는 게 더 좋을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사소한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읽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자신이 친구를 이토록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와 사소한 분쟁이 생겼을 때에도, 아이는 같은 과정으로 고민을 하고 양보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는 자연스럽게 메타인지를 배우게 된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고민하는 시기가 되면 태어나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키우는 건 부모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매 순간 자기주장을 하게 되고 좋고 싫은 것이 있으며 부모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만 힘들 뿐, 학령기가 되면 오히려 편해진다.

반면, 사례에서처럼 억울함·공포감·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훈육하게 되면 힘이 없는 어릴 때는 복종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체구가 커지고 더 이상 부모가 위협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면 오히려 반항하고 대화를 단절하며, 급기야 같은 방식으로 부모를 위협하기도 한다.

어버이날을 혐오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은 감히 바랄수도 없다.

어떤 부모는 체구가 커질 때 즈음부터는 돈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돈으로 하는 위협은 자식을 평생 자신 손바닥 안에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자식이 성공해서 돈을 잘 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두려워서 자식의 성공을 내심 바라지 않는 부모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충격적이다.

자식이 자신이 사는 집보다는 작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보다는 땅값이 낮은 동네에서 살아야 하며, 항상 자신의 그늘 안에 있어야 부모를 존경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하다.

정리하면, 아이의 메타인지를 방해하는 세 가지 감정으로 억울함·공포감·수치심을 이야기했다. 이 세 가지 감정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방해하며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만 보게 만든다. 메타인지가 되어야 리더십도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타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리더십을 키울 수 없다.

셀프리더십은 자신의 판단 아래 자신을 조절·통제하는 능력이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려면, 혹은 아이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 하려면 해가 되는 세 가지 감정을 멀리하고 메타인지를 키워 리더십을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이면

카리스마(Charisma)는 ‘재능, 신의 축복’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카리스마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대부분 사람은 ‘강렬한 분위기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 정도로 이해한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때로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동조하고 굴복하게 된다.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보통 리더가 되며 전쟁이 잦았던 과거에는 카리스마를 리더의 좋은 자질로 평가하기도 했다. 수많은 병사들을 낙오자 없이 통제해야 하는 군대에서는 카리스마가 꼭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회사나 가정에서 카리스마가 좋은 것일까?
카리스마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혹은 함께 사는 것이 좋기만 할까?

‘카리스마’와 어울리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 회사와 가정에서 꼭 필요한 ‘소통’이라는 단어는 카리스마와 어울리는지 떠올려보자.

카리스마 있는 리더는 보통 소통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지시적으로 명령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혼자 고민하거나, 높은 강단에서 혼자 강연하는 등 혼자 지내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는 직접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카리스마 있는 엄마의 이미지는 ‘공부 대신 네가 무얼 했는지 떠올려보면 이번 시험을 망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겠니?’와 같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라’라는 메시지를 대신한다.

카리스마 있는 상사가 무언의 메시지를 통해 직원을 압도하고, 직원은 카리스마에 제압당해 제대로 항변 한번 못해보고 참는 경우가 있다.

위의 사례처럼 카리스마는 보통 권위자에게 느낀다.
유치원 다니는 내 딸이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부장님이 막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자네는 참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칭찬하는 일도 없다.

권위자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좋게 작용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권위자가 부도덕할 경우, 비리·횡령에 휘말린다거나 성추행당하기도 한다. 가정에서의 카리스마는 상대방의 행동을 조종할 때 주로 쓰이는데, 뱀 소리 ‘쓰읍!’과 함께 말 한 마디 안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든다.

어떠한 항변할 기회도 없고 소통할 기회도 없다.

카리스마가 가진 힘은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억울한 마음이 쌓이게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힘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는지 인지할 틈도 없이 행동하게 하고 돌이켜보고 황당하고 화가 나고 억울해진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할 선택의 틈도 주지 않고 얼렁뚱땅 하게끔 만드는 건 정신 조종의 일종이다. 몇 년 전부터 화두가 된 ‘가스라이팅’ 또한 권위자가 가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도덕한 권력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가스라이팅 하려고 하고, 그것을 인지하거나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카리스마는 위험하다.

카리스마는 리더의 덕목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만약 카리스마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지금부터는 자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보자. 자녀 관점에서 카리스마는 때로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수현 씨(28)는 과거 한 기관에서 리더십 강의를 들었다. 이날 강연자는 군대에서 한평생을 바치고 퇴직한 장군이었고, 그가 한 강연은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에서 막 일을 시작한 김수현 씨는 리더를 이해하기 위해 강연을 신청하였으나, 소통에 대한 내용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것이 대표적인 리더십에 대한 오해이다.

군대에서의 리더십과 회사에서의 리더십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군대의 목표는 전투 현장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회사의 목표는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리더십도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 많은 자녀를 낳고 조부모와 같이 살았던 큰 가족의 형태에서, 부모와 자녀만 같이 사는 작은 가족의 형태로 변한 것처럼, 이에 맞는 가족 구성원의 생활방식, 소통 능력, 문제해결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과거에서처럼 아이들이 알아서 크는 형태가 아니며, 아이들은 부모와의 강한 애착과 소통을 요구한다. 부모의 권위를 버리고 소통하려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모니까 무조건 순종하라는 건 자녀가 사회에 나와 글로벌 인재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카리스마와 같이 복종과 통제는 올바른 리더의 역량이 아니다.

불합리한 상황에 자주 노출된 사람과 아이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설정할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반장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 등의 특혜가 주어진다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 살기 쉽다’, ‘세상은 공평하거나 정의롭지 않으니 내가 권력자가 되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정의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자신을 권력자로 생각하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며, 타인이 기준이 된 삶에 리더십은커녕 행복조차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타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방법,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방법만을 찾게 되고, 그 방법은 건강한 방식이 아닐 것이다. 카리스마, 가스라이팅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

가부장제가 리더십을 방해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리더가 될 수 있고, 내 삶의 리더는 나 자신이며, 그러므로 리더십은 모든 사람이 배워야 할 교양 같은 것이다. 도덕처럼 말이다.

한 회사에서 20~30년 근속하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회사는 좋은 대학 나온 우수한 사원을 뽑아 회사에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지만 직원은 일만 배우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2~3년 만에 떠난다.

요즘에는 직업을 아예 바꾸기도 한다. 더 이상 평생직장이라는 의미가 무색해졌다. 평생직장을 다니던 과거에는 내가 늘 만나던 사람을 평생 만난다.

신입직원이 들어오면 연차가 오래된 선임이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그렇게 위계질서가 잡힌다.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리더가 되고 한번 리더가 되면 쭉 리더를 하다가 명예롭게 퇴직한다.

하지만 이직과 전직이 잦은 요즘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과 일하게 된다.
더 이상 연차가 실력을 보증하지 않고 경력과 경험을 들이대며 조언하고자 하면 ‘꼰대’가 되고 만다.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이른바 줄타기도 잘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목표한 일만 배우면 그만두는 요즘에는 회사 공동체의 분위기나 상사의 눈치를 보며 허비할 시간이 없다.

조직문화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변화에 둔감한 리더는 빠르게 교체된다.
리더가 되었다가 멤버가 되기도 하고, 멤버였다가 이번 프로젝트만 리더가 되기도 한다. 리더와 팔로워의 개념이 무너졌다. 이것은 회사의 이야기이다.

가정에서는 어떨까? 가부장제의 구조가 당연시되었던 과거에는 당연히 아버지가 가장이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어머니가 돈을 더 많이 벌어도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어머니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을 전담했다.

그 시대에 가정의 리더는 아버지였고, 기여도와는 상관없이 결정은 늘 아버지의 몫이었다. 예를 들면 장을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것은 어머니의 노동이지만, 그날 무엇을 먹을지는 아버지가 결정했다. 자녀가 유학을 가고 싶다던가 이사를 하는 등의 큰 결정 또한 아버지의 허락이 중요했다.

아버지 중심의 가정구조였고 자녀는 항상 아버지를 위해 조용히 하거나 개인 일정을 포기하는 등의 희생을 했어야 했다.

요즘에는 어떤가? 대부분의 가정이 자녀 중심이다.

식사 메뉴는 자녀가 좋아하는 걸로, 여행지는 자녀가 학습경험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선택된다.

사실상 가부장적인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가족 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아버지가 가장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가장이 되기도 하는 시대이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리더십은 모두가 배워야 하는 덕목이다.

남편이 나가서 돈을 벌어오니 아내는 집에서 살림과 육아를 잘해야지라는 역할 분담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을 잘하고 저축을 많이 해서 집을 샀으니 “누구 남편은 여자 잘 만났다”라는 말은 옛말이다.

일단, 저축해서 집 살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현모양처가 꿈인 여자는 거의 없으며, 현부양부가 꿈인 남자가 많아졌다. 인터넷에서 ‘직장 생활이 맞지 않아 힘들다. 나는 남자인데 일머리가 없는 것 같다. 여자라면 요리하고 살림하고 살고 싶다. 요리, 살림은 잘할 자신 있다.’라는 글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이 전업주부를 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과거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아버지가 가장이었던 이유가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어서라면, 어머니가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는 가정은 어머니가 가장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그늘에서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을 기다리고 갈망하는가?

아니면 아버지가 가장이었던 이유가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논리 아래, 어머니가 경제적 책임을 지고있고 아버지가 전업주부여도 아버지가 가장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결정에 복종하는가?

둘 다 이상하다. 누구 하나 가장이라고 역할을 고정해놓으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할 분담이 해체되면 위계질서도 같이 해체될 수 있다.

그러면 가족 구성원 개개인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아버지는 가장이라는 책임감에서 해방되어 병이 있는 것을 숨기고 회사를 목숨 걸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아버지도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고 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어머니는 답답해도 자식들을 위해 집안에서 언제 희생할 때가 올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사회생활을 하고 싶을 때, 원할 때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선택의 기회가 있으면, 그런 희망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고,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것이 리더십의 시작이고 메타인지의 핵심이다.

역할 중심의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는 리더십은커녕 메타인지도 불가능하다.

리더십은 리더가 되면 생기는 능력 같은 게 아니다. 리더십이 있어야 리더가 될 수 있고, 상대방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나도 리더가 될 기회가 생긴다.

가정에서도 그런 문화가 필요하다. 엄마의 희생으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성공했다는 성공스토리는 가정리더십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문화에는 리더십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일 수가 없다.

거창하게 리더십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엄마의 희생이라고 하자.

리더십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권리 그 자체이며, 그 권리를 인정할 때 나오는 마음가짐이다.

만약 ‘밥은 엄마의 몫’, ‘행주는 엄마 거’, ‘앞치마=엄마’로 내 머릿속에서 상징화된다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집은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는지, 리더십이 있는지 말이다.

*****

임포스터(가면 증후군)

부모도 마음속에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인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메타인지가 가능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아이를 마음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성인들의 메타인지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 중의 하나는 가면이다.

리사손은 <임포스터>라는 책에서 ‘가면 증후군’은 전세계적으로 약 70%가 가지고 있고 너무 흔해서 증후군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고 하였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가면 증후군이 많은데, 가장 흔한 것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 ‘신사임당 콤플렉스’, ‘완벽주의’, ‘츤데레’와 같은 것들이다.

자녀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부모는 권한을 갖게 된다.
자녀는 부모의 보호를 감사히 여기고  부모가 가진 권한을 존중하지만, 대부분 부모는 권한부터 생각한다. 자녀는 권위를 줄 마음이 없는데 부모는 자신의 권한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며 자녀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이다.

자신은 옆으로 걸어가면서, 앞으로 걸으라고 가르치는 꽃게의 우화를 모두들 알고 있는가?

자신이 옆으로 걷는다는 걸 모른 채 앞으로 걸으라고 강요하는 부모 꽃게를 보며 ‘앞으로 걸어야 하는 거구나’라고 느끼는 자녀 꽃게는 없다.
‘왜 나한테만 강요하는 거야? 부모 본인들은 하지도 못하면서!’라는 반발심만 강해진다.

이는 부모 자신이 마음의 거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요구받는게 많은 성인은 아이들보다 마음의 거울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 리사손은 세계적으로 약 70%가 가면증후군을 가졌다고 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가면증후군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성인일수록 거울을 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리사손이 유튜브에서 알려준 임포스터 척도와 테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면증후군 척도*

(1점) 전혀 그렇지 않다

(2점) 가끔 그렇지 않다

(3점) 보통이다

(4점) 자주 그렇다

(5점) 아주 그렇다

1. 타인의 평가에 두려움을 느낀다 → 혼자서 일한다

2. 자기 능력을 평가절하한다 → 도움 달라고 못 한다

3. 완벽주의가 있다 → 시도를 안 한다

4.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한다 → 피드백을 못 받는다

5. 성공을 두려워한다 → 인정을 피한다

나는 가면증후군 몇 점일까?*

1. 나는 나에 대한 평가를 최대한 피하는 편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2. 사람들이 나의 성공과 성과를 칭찬할 때 나는 앞으로 내가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3. 나는 내가 현재 얻은 지위와 성공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종종 느낀다.

4. 내 주변 사람들이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걱정된다.

5. 나는 내 인생과 직장에서의 성공이 어떤 잘못된 결과에서 비롯됐다고 종종 생각한다.

6. 나는 “너 똑똑하다”, “너 대단하다”와 같은 칭찬 듣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7. 나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부족한 지식과 능력을 알아채게 될까 두렵다.

8. 나는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실패할까 봐 걱정이 된다.

9. 내가 성공을 하고 인정을 받을 때 앞으로도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10. 내가 큰 성공을 이뤄 공로를 인정받게 되면 나는 내가 해낸 일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20점 이하 : 정상

23~30점 이하 : 가면 증후군

31~40점 미만 : 상당한 가면 증후군

40점 이상 : 심각한 가면 증후군

(*출처: 리사손, 어쩌다어른 http://www.youtube.com/watch?v=Gi6EgXxY0GQ)

저자는 주변 지인들 수십 명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함께 진행해 본 결과, 20대 석사 학생을 제외하고 모두가 20점 이상, 대부분은 30점대, 50대 이상은 40점대도 많았다.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게 나왔다면 리사손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기를 권한다.
저자는 리사손 교수와 메타인지를 소개한 것일 뿐이며, 리사손 교수는 메타인지의 세계적인 전문가로서 강의를 직접 듣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을 속이며 가면을 쓰고 살아왔던 것이다.
가면을 쓰면서 생기는 마음속의 딜레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가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가면 증후군이 성공한 사람에게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가면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아니다.

가면 증후군은 나의 두려움을 보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임과 동시에, 나의 행복을 보는 눈 또한 멀게 한다.

가면 증후군을 쓰고 사는 삶에 꼭 따라오는 것은 공허함이다.
외로움으로 느낄 수도 있고, 분노로 느끼는 사람도 있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파티를 찾아다니거나, 술을 마시거나, 일이나 공부에 집착하는 등, 중독이나 강박감이 생긴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하는 순간, 공허함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다. 공허함을 없애는 게 아니라 회피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직면하고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감정을 느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을성이 생기고 공허함이 사라진다.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타인이 아닌 내가 되려면 메타인지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가 메타인지가 가능해야 자녀들도 가능하다.
어린 아이일수록 부모의 딜레마적인 마음을 빨리 눈치채고, 그 분위기와 냄새에 빨리 적응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는 가면 증후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시작의 반은 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걸 안다고 달라질 게 없어. 이제 와서 어쩌겠어. 한평생 이렇게 살아왔고 이제와서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식의 결과론을 앞세워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내면을 직면할 때 느끼는 두려움을 벗어나려는 시도이고 이러한 회피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르던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알면 잊어버릴 수 없다. 더 이상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으며 내 삶 곳곳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조금씩 변화를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큰 변화를 받아들이고 직면할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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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이름없음
    1년전

    육아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 이*애
    1년전

    아이가 앞에 있는데서
    과장된 칭찬을 할 때 아이는 수치심을 느낀다는 부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앞으로 메타인지 교육을 필수과목으로 한다면
    밝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눈앞에 보이네요.
    정보 고마워요.

  • 이*원
    1년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타인이 아닌 내가 되려면 메타인지가 꼭 필요하다. ☆☆☆☆☆

  • 앰버서더
    김다연
    1년전

    맞습니다♡♡♡ 놓치지 않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